올해 들어 한반도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한민족 운명의 운전대에 앉았다고 자신했지만, 북한의 연속적인 미사일 및 핵 도발과 트럼프 행정부의 시도 때도 없는 대북 선제공격 가능성 발언으로 우리는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 때마다 강력히 대응하고, 미국의 대북제재에 공조하면서도 일관되게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정상화 의지를 고수했으며, 사드를 배치하고 개성공단 재개를 자제하면서 한미 공조를 지켜온 결과, 마침내 그 효과가 올해 들어 발현됐다. 김정은이 전격적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남북관계 정상화 의지를 피력했고, 문 대통령이 김영남과 김여정을 예우를 갖춰 환대하는 한편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림픽 성공 개최의 공을 돌리며 남북 화해와 한미 공조를 치밀한 외교와 지극정성으로 추진한 결과 한반도에 화해 분위기가 극적으로 형성됐다.
북·미 정상회담 성공 장담 어려운 이유
우리의 관계 개선 의지에 대해 김정은은 조건이 맞으면 궁극적으로 핵을 포기할 수 있고, 북·미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핵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예년 수준이라면 한미 연합훈련 시행을 이해한다고 한 뒤, 한국에 대해서는 재래식 무기로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올림픽 개막을 축하하러 온 김여정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김영남 위원장이 참석한 리셉션장에서 퇴장해 옹졸한 외교라고 비난을 받은 데서 교훈을 얻은 트럼프 대통령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정상회담을 수락함으로써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안보 정세는 결정적인 기로에 서게 됐다.
물론 가능성은 평화 쪽으로 기울고 있으나 김정은의 호전성과 트럼프의 즉흥성을 감안할 때 만약 북·미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난다면 한반도에 사상 초유의 안보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다행히 북·미 정상회담 전에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므로 우리가 잘 준비해 디딤돌을 놓아준다면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돼 한반도 안보 구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된 데다 아베 총리도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하고, 중국도 고위급 특사를 북한에 보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미, 한일, 한·중·일 정상회담까지 연속적으로 정상회담이 기획되고 있어 얼핏 한반도 주변 안보 정세가 불가역적인 평화 구도 속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냉철하게 보면 이러한 데탕트 분위기의 핵심인 북한의 비핵화에서의 진전은 겨우 한두 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조건부 비핵화 의지와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를 위한 프로그램은 계속 가동 중이다. 비핵화라는 개념도 북·미 상호 간에 정립되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크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서 비핵화를 거론할 때 서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므로 사전에 개념 정의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또한 트럼프는 북한이 압박과 제재로 못 살겠으니 회담에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김정은은 이제 미국을 가격할 수 있는 핵과 미사일을 완성했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전략적 전환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각각 자신을 협상의 귀재라고 생각하고 있고, 두 사람 모두 협상이 깨져도 크게 손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월 8일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굳건한 한미 공조를 강조했다.
더구나 김정은이 시작한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로부터 트럼프가 주장하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로서의 비핵화(CVID)까지는 매우 많은 중간 단계가 있다. 먼저 동결 과정이 있는데, 과거 북한의 핵시설이 영변에 집중돼 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우라늄 농축시설이 여타 지역에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또한 완성된 핵무기와 미사일이 북한 전역에 산재해 있을 것이므로 이러한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정확한 신고와 사찰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동결의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영변의 핵시설을 동결한다고 해서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완화했는데 북한이 다른 곳에서는 계속 우라늄을 농축하고 미사일을 개발하고 고도화한다면 그야말로 북한에 농락당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동결 과정에 들어갈 때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완전한 목록 신고와 검증 과정이 필요한데 과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이다.
특히 김정은이 핵을 포기한 뒤에는 재래식 군사력만 갖게 되고,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주한미군을 제외한 한국의 군사력에도 뒤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뿐 아니라 미국을 완전히 신뢰할 때까지는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설사 트럼프를 믿는다 하더라도 차기 정부가 신뢰할 만한 정부라고 확신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대응 방안
과거 사례들도 북한의 대미 불신을 강화시켰다. 먼저 미 행정부와 타협한 카다피나 여러 차례 사찰을 수용한 사담 후세인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란이 미국을 포함한 안보리 5개국+독일과 타협했지만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 협정을 불인정하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서방의 안보 보장하에 핵을 러시아로 이전한 우크라이나가 결국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빼앗기는 것을 미국 등이 방관했다.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를 신뢰하고 핵을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은 크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북한이 버틴다면, 트럼프는 완전한 비핵화가 어려우므로 중간선거에서 유용할 정도의 타협만 보면 된다고 생각해 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과 핵의 추가 생산 중단, 그리고 확산 방지만 약속받고 북한이 이미 보유한 기존 핵과 미사일은 묵인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여러 난관이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우리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진전이 도출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실패할 경우에도 우리에게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하는 안보 조치도 강구해둬야 한다.
먼저 남북 정상회담 전에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가설될 예정이므로 남북 정상은 향후 수시로 전화 통화가 가능하고 셔틀 정상회담도 개최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보다 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 구축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남북 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을 계승하고 남북관계를 재정립하는 남북 기본조약을 준비하기 위해 고위급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양측의 대외정책을 조율하는 정책 조정기구를 설치하며, 국제 제재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호관계 개선의 동력을 이어가는 교류와 협력에 합의하는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 또한 양측은 평화 공존을 선언하고 한국은 북·미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중점적으로 논의할 핵심 의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구축이어야 한다. 사전에 미국과 긴밀히 의견을 조율하면서 북한을 비핵화로 인도할 압박과 유인책을 강구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에 순응할 경우 단계적으로 우리가 어느 제재를 어느 정도 풀어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지를 조율해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이를 설명하면서 비핵화 결단을 유도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과제는 동결에 들어갈 때 북한이 가진 핵과 미사일에 대한 보유 현황 목록 제시와 적절한 사찰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CVID 방식으로 완전히 비핵화를 했을 때 군사 위협이 어떻게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가 어떻게 보장될 것인지도 설득력 있게 얘기해주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남북·주한미군 3자 간의 재래식 군사력 균형에 대한 합의와 핵 억지력을 북한에 제공하는 것을 수반하는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수교 정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특히 북·미 수교는 발상을 전환해 보상이 아니라 핵 포기 유인책으로 선제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측면 지원 유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북·미 간 핵 합의 타결을 바라는 입장이다.
5월 북·미 정상회담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미 국무부 대북 협상팀이 거의 해체 상태이므로 미국이 비핵화의 단계별 보상 일정표를 작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북·미 정상회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북·미가 타협할 수 있는 로드맵을 작성해준다는 각오로 미국을 도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북·미 간 타협의 기본 기조는 상대방의 안보 우려도 고려해준다는 상호 안보와 상호 위협 감소 원칙, 그리고 동시 행동의 원칙이 적용돼야 할 것이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도 북·미 간 핵 합의 타결을 바라고 있으므로 이 두 강대국도 북·미 간 합의 도출에 측면 지원을 제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특히 북·미 간 타협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시적으로 이뤄지도록 남북한·미·중 4자회담이 개최되도록 하고,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해 6자회담이 재개돼 핵 문제를 타결하면 그 연장선에서 6자 간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구축도 이뤄져 한반도 평화가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체제 그리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등으로 중첩적으로 보장되도록 도모해야 한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