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 어린
한국 성곽의 ‘꽃’
유네스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발굴·보호·보존하기 위해 1972년에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을 채택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등재를 시작으로 모두 12점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유산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편집자>
| 양영훈 여행작가 |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는 어김없이 고성(古城)이 있다. 십중팔구는 필수 경유지여서 자연스레 여행 코스에 포함되게 마련이다. 동화 속의 공주가 사는 곳처럼 아름다운 고성들을 둘러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뿐이다. 왕이나 영주, 귀족들만의 세상이었던 그곳에서는 더 이상의 감동은 느끼기 어렵다. 불과 몇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수천, 수만의 힘없는 사람들이 흘렸을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오래 머물고픈 마음조차 사라진다.
유럽 고성들이 대부분 지배자들만의 공간이었던 반면, 우리나라의 옛 성은 나라를 지키는 보루이자 민관이 함께 생활하던 일상 삶터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수원 화성(사적 제3호)이다.
화성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기획한 신도시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제일의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으로 옮겨 융릉(隆陵)을 조성했다. 그리고 화산 부근에 있던 수원의 읍치(邑治·관청 소재지)를 지금의 위치인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이전하면서 화성을 건설했다.
둘레 5744m, 높이 4~6m의 화성을 건설하는 데는 조선의 건축 능력과 과학기술, 최고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었다. 실학파의 거두였던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고,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이 공사 총책임자를 맡았다. 축성 공사는 착공 2년 반 만인 1796년 9월에 끝났다.
화성은 오늘날까지도 축성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전쟁이나 개발 등으로 훼손됐던 부분도 근래에 모두 복원되었다. 공사 직후인 1801년에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완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성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아름답다. ‘우리나라 성곽의 꽃’, ‘근대 초기 성곽 건축의 백미’라는 수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5.7km의 성곽 길을 찬찬히 걷다 보면 화성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화성 성곽 길은 어디서 출발해도 무방하다.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순환형 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안문(長安門· 보물 제403호)에서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다. 완주한 뒤에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기에 편해서다. 화성의 정문이라는 의미도 각별하다. 우리나라 옛 성의 정문은 대개 남문이지만, 화성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정조가 맨 먼저 들어서는 북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장안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보다도 규모가 크다. 다양한 방어시설이 갖춰진 점도 숭례문과는 확연히 다르다. 옹성, 북서적대(敵臺), 북서포루(砲樓), 북동적대, 북동포루, 북동치(雉) 등이 모두 장안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장안문에서 동쪽으로 0.5km 거리에는 화성의 2개 수문 중 하나인 화홍문(華虹門)이 있다. 화성으로 흘러드는 수원천의 물길 위에 일곱 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다리와 누각을 세웠다. 바로 옆의 높은 언덕에는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으로 더 잘 알려진 동북각루가 우뚝 서 있다. 적군을 감시하는 망루이자 휴식 공간이다. 정자 아래의 인공 연못인 용연과 어우러진 광경도 아름답고, 이웃한 화홍문과의 조화도 그림 같다. 우리나라의 옛 정자 가운데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방화수류정에서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북암문 앞을 지난다. 화성에 모두 5곳이 설치된 암문은 성 밖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위치한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가는 길에는 동북포루, 동암문, 동장대(연무대), 동북공심돈, 동북노대(弩臺) 등이 잇따라 자리한다. 그중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가 눈여겨볼 만하다. 두 군데에 만들어진 공심돈(空心墩)은 이름 그대로 ‘속이 빈 돈대’이다. 툭 불거진 성벽 위에 설치돼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봉수대처럼 우뚝한 노대(弩臺)는 ‘쇠뇌’라는 다연발 화살을 쏘던 곳이다.
창룡문과 팔달문의 중간쯤에는 5개의 커다란 연통이 설치된 봉돈(烽墩)이 있다. 동쪽으로는 용인의 석성산 봉수, 서쪽으로는 수원 흥천대의 바닷가 봉수와 연결된다. 산꼭대기가 아닌 성벽에 자리 잡았고, 봉돈 주변에는 여러 개의 총구가 뚫려 있는 점이 특이하다.
봉돈에서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八達門·보물 제402호)은 지척이다. 팔달문 주변에는 유달리 시장이 많다. 팔달문시장, 수원영동시장, 지동시장, 못골종합시장 등의 상가가 빼곡해서 늘 분주하고 활기가 넘친다. 애초부터 수원 화성은 군사·정치적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적 기능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됐다.
팔달문에서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까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다행히도 숨 가쁜 오르막길은 별로 길지 않다. ‘화성장대’라고도 불리는 서장대는 군사지휘소였다. 사방으로 시야가 훤히 트여 있어서 화성뿐만 아니라 수원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조도 친히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휘한 적이 있었다. 서장대 옆에는 거대한 화로 모양의 서노대가 있다. 창룡문 근처의 동북노대와 같은 기능을 한 시설물이다.
서장대에서 내리막길을 500m쯤 내려가면 화서문에 도착한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화성의 대표적인 절경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성벽 위에 높이 치솟은 동북공심돈은 하늘로 솟구치는 새처럼 날렵하고 경쾌하다. 서북공심돈에서는 출발지인 장안문이 코앞이다. 굴곡 없이 반듯한 성곽 길을 600m만 더 걸으면 화성 성곽 일주가 마무리된다.
화성 답사여행에서는 화성행궁을 빼놓을 수 없다. 총 12차례에 걸친 정조의 능행차 때마다 임시 궁궐로 사용됐고,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의 관청으로도 활용된 곳이다. 원래 657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학교, 병원, 경찰서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그러다 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주요 건물 482칸을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돼 2003년에 완공됐다.
화성을 완벽하게 답사하려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융건릉(사적 제206호), 융건릉의 원찰인 용주사까지 꼭 둘러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화성을 건설한 정조의 남다른 효심(孝心)과 높은 이상(理想)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여행 정보
숙식
화성 안에는 수원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수원호스텔(031-254-5555)을 비롯해 뉴수원관광호텔(031-245-2405), 도노호텔(031-258-8881) 등의 숙박업소가 있다. 근래 들어서는 슬리핑테이블(031-255-3723), 공존공간(070-4241-2116), 행궁채(031-258-7851) 등의 게스트하우스가 인기 숙소로 자리 잡았다.
맛집으로는 중국식 만두와 쇠고기탕면이 맛있는 중화요리점 수원(031-255-5526), 수원에서 내력 깊고 맛좋은 곱창구이집으로 유명한 입주집(031-255-5384), 수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식집이라는 코끼리만두(031-255-6704) 등이 손꼽힌다. 매향통닭(031-255-3584), 진미통닭(031-255-3401), 용성통닭(031-242-8226) 등을 비롯한 통닭 전문점이 밀집한 수원 통닭골목도 화성 내에 형성돼 있다.
찾아가기
대중교통 수원시 권선동의 수원종합터미널(1688-5455)에서 팔달문 가는 버스는 7-2, 64, 82-1, 88, 112번이다. 수원역 앞에서는 7, 10-5, 11, 13, 35번 버스를 타야 팔달문 정류장에 도착한다.
승용차 영동고속도로 북수원IC(1번 국도)→화성 장안문(또는 창룡문) 주차장, 또는 동수원IC(43번 국도)→창룡문 주차장
주차장 화성행궁, 연무대, 장안문 근처에 대형 공영주차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