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10·10 국면에서 한반도 위기는 고조되지 않았다.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식을 즈음한 북한의 도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었고, 북한 스스로도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 도발 위협을 직접 언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북한은 도발을 선택하지 않고 대외관계 정상화에 무게를 두었다..
우선 류윈산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으로 오랫동안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었다. 3차 핵실험 이후 북·중 간에 고위급 방문이 중단된 것에 비추어보면 중국 권력 서열 5위의 방북은 관계 해빙의 여건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국제사회가 우려하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자제함으로써 중국이 고위급 대표단을 보낼 수 있는 체면을 세워줬고, 중국 역시 2013년 이후 최고위급의 대규모 대표단을 보냄으로써 북한의 당 창건 행사에 체면을 세워준 셈이다. 서로가 체면치레를 챙겨주면서 북·중관계 정상화의 첫 단추를 풀어낸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북·중관계는 우리가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처럼 쉽사리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09년 2차 핵실험 이후에도 중국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불편해했지만 결국은 그해 가을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으로 오히려 북·중관계는 전략적으로 격상됐다. 이번 류윈산의 방북도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을 아직 버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10·10 국면에서 김정은은 북·중관계 정상화와 함께 대외적으로 강경한 도발 입장보다는 경제 우선과 인민 중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열병식에서도 위협적인 군사 신무기를 공개하지 않았고, 연설에서도 경제와 인민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미국과의 전쟁 불사 입장은 노동당 창건 기념식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미국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 원칙적 입장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오히려 류윈산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평화로운 환경’을 강조하고 미국에 평화협정 협상을 제의한 것은 여전히 북·미 대화의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우려했던 10·10 국면은 다행스럽게도 8·25 국면을 훼손하지 않고 남북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북이 도발 대신 유연한 선택을 함으로써 8·25 합의에 따른 첫 실천으로서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될 수 있었다. 휴전선 긴장 고조 끝에 어렵사리 이끌어낸 8·25 합의의 동력을 이제는 더욱 키워나가야 한다.
어렵게 마련된 남북관계 개선 동력은 과도한 기싸움과 맹목적 강경의 유혹에서 벗어나 조금씩 작은 것부터 성사 가능한 것부터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원하는 드레스덴 선언과 민생, 환경, 문화 등 3대 통로와 함께 북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군사 의제도 논의할 수 있도록 의제의 포괄성을 견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실질적으로 구동될 수 있도록 8·25 합의의 정신을 조심스럽게 살려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8·25 동력의 강화야말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힘찬 발걸음이 될 것이다.
김근식
서울대 정치학과 졸.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 서울시 남북교류 협력위원,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