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행 통일 여행

제암리에 있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제암리에 있는 3·1운동 순국기념탑.

“3·1운동 숭고한 정신
민족 대화합·통일로 승화”

제암리는 99년 전,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식을 발현한 3·1만세운동의 상징 같은 곳이다. 그날의 희생자들이 보여준 민족의식과 단합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대화합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제암리의 봄은 울음으로 찾아온다. 뜨거운 울음으로 온다. 1919년 3월, 한반도는 분노로 끓어 올랐다. 함성으로 끓어 올랐다.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 백성들이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떨쳐 일어났다.

경기 화성 제암리 사람들도 만세를 외쳤다. 기독교,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고을 사람들이 3월 30일 인근 마을 발안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봉화를 피워 올렸다. 일본인 부녀자들은 성난 군중이 두려워 피신했다. 일본군이 처절한 보복에 나섰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가 이끄는 군경이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제암교회에 몰아넣었다. 교회 문을 잠그고, 안에 갇힌 이들을 총칼로 학살했다. 증거 인멸을 위해 교회 건물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민가도 불에 탔다. 여자들도 살해되었다. 교회 안팎에서 23명이 희생되었다. 이어 옆 마을 고주리로 이동한 일본 군경은 그곳 주민 6명도 살해했다. 만세운동으로 가장 많은 백성이, 가장 잔인하게 학살된 땅 제암리와 고주리. 그래서 100년에서 한 해가 모자란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곳의 봄은 울음으로 찾아온다.

제암리에는 그때를 기억하기 위한 순국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순국기념탑과 전시관, 학살 희생자 23분을 함께 모신 합동묘가 몇 걸음 내의 거리에 모여 있다. 일대가 사적 299호로 지정됐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내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내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내부.

기념관 입구를 알리는 팻말을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순국기념탑이다. 1959년 제암리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처음 비가 세워졌으나, 작고 초라해 1983년에 다시 지었다.

시인 박종화가 짓고 서예가 김응현이 쓴 제문이 아랫돌에 새겨져 있다. 기념탑의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들은 서예가들 사이에서 역대 대통령은 물론 왕조시대 임금들 중에서도 잘 쓴 글씨로 꼽힌다. 실정(失政)으로 하야한 전 대통령의 글씨를 여기서 만난다.

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스코필드 박사를 기리는 조형물이 눈에 띈다. 앉은 자세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과 그의 생애를 설명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2015년 그의 손녀 리사 스코필드 크로포드가 방한했을 때 심고 간 설탕단풍나무가 있다. 아직은 키가 작은, 어린 나무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알려진 학살의 진실

제암리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언더우드 등이 소문을 듣고 처음 이곳을 찾았고, 뒤이어 세브란스의전 교수이자 역시 선교사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상세한 진상조사를 진행해 세계에 알렸다. 세계의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일제는 현장 지휘책임자 아리다 중위를 군법회의에 부쳤다. 결과는 무죄 판결이었다.

기념탑에서 전시관으로 향하는 길목의 계단을 올라서면 제암리에서 희생된 23분의 합동묘역에 닿는다. 스코필드 박사가 흩어진 유골을 수습해 4km 정도 떨어진 향남읍 도이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참혹한 현장.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참혹한 현장.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찾은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참혹한 현장.

1982년에 이르러서야 학살 사건 때 남편을 잃은 목격자 전동례 할머니와 주민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를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모셔진 분들의 이름을 훑어보면 안씨 성이 유독 많다. 절반을 넘긴 열두 분이다. 일가 친척이 몰살된 듯하다.

제암교회는 지금도 제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번이 네 번째 건물이다. 1905년 처음 세워져 1919년 학살과 함께 소실된 건물은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다. 1938년 교회 건물을 다시 일으켰고, 이는 다시 일본인들의 모금으로 1970년 새로 건립된 건물로 교체된다. 지금 건물은 2001년에 세워진 것이다.

‘잊지는 말되 용서는 하자’는 화해의 현장

제암교회와 맞닿은 전시관에서는 제암리 학살의 배경과 과정을 유물, 사진과 글로 상세히 보여준다. 1982년 유해 발굴 작업 시 함께 발견된 저고리 단추, 불탄 교회 대들보 등도 전시돼 있다.

1919년 피해 건물을 재건하기 위해 지급된 목재 배급표, 학살을 주도한 아리다 중위에게 내려진 무죄 판결문, 1953년에 작성된 피살자 명부 등도 눈길을 끈다. 전시물에 대한 설명이 글로 적혀 있으나 숙련된 해설사들이 더 상세히 안내해준다.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맞춤한 곳인 만큼 수많은 이의 발길이 이어진다. 한 해 방문객이 10만여 명. 특히 만세운동이 시작된 3·1절과 제암리 학살이 자행된 4월 15일, 그리고 8·15 광복절에는 하루 수천 명이 순국기념관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순교지이기도 하지만 기독교계에서는 ‘순교의 현장’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단체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이 전체 방문객의 60~70%에 달한다. 그 외 학교나 군부대 등에서 단체 방문하고 가족 단위 방문객도 많다.

3·1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는 제암리 주민들. 3·1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는 제암리 주민들.

“다만 학생들의 단체 관람은 주로 화성 주변 지역 학교에 집중돼 있어, 좀 더 전국적으로 너른 지역 학교에서 찾아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게 안순자 문화관광해설사의 이야기다.

순국기념관은 우리에게 분노와 애한을 느끼게 하는 곳이지만, 또한 화해와 용서의 현장이기도 하다. 기념관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잊지는 말되 용서는 하자’는 것이다. 참회를 위해 찾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많을 때는 하루 3, 4팀의 일본인 방문객이 이곳을 찾았다고 안순자 해설사는 말한다.

“어느 일본인 교사는 시청각 자료를 볼 때부터 울기 시작해 제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사죄하기도 했고, 한 가족이 아이들 손을 잡고 일본에서부터 찾아와 합동묘역에서 20분간 울며 기도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암리에 있는 스코필드 박사 기념상. 제암리에 있는 스코필드 박사 기념상.

이곳에서는 또한 세계 곳곳에서 20세기 들어 일어난 학살 사건에 대한 전시도 한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난징 사건,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 인종 혹은 종교의 다름, 이념의 다름을 이유로 벌어진 잔인한 학살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다름과의 공존’과 ‘평화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3·1운동의 정신 자체가 그러하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계급과 종파와 이념을 넘어서서, 백성은 하나가 되었다. 맨손으로 평화롭게 독립 만세를 외쳤다. 전시관에 새겨진 글귀는 그 같은 만세운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일깨워주고 있다.

“그날의 희생자들이 보여준 민족의식과 단합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대화합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다.”

해마다 4월 15일 추모 행사 열려

올해 기념관에서는 3월 1일을 맞아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독립만세축제’를 연다. 태극기 버튼 만들기, 화성 독립운동가 등불 만들기, 독립운동가의 명언이나 가훈 캘리그래피로 적어주기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가족과 함께 찾기에 제격이다. 해마다 추모제가 열리는 4월 15일에 맞춰 기념관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암리 3.1운동 기념관 약도

평소 전시관 개장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마지막 입장은 오후 5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과 신정, 설, 추석 당일에는 휴관한다. 단체 관람과 해설사의 안내를 요청할 경우 031-369-1663으로 예약해야 한다. 개별 관람자는 별도 예약 없이도 단체 관람객들과 함께 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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