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역사 탐방

문무대왕 수중릉

문무대왕 수중릉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
파도와 바람이 일깨우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며 자신을 동해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옥대, 만파식적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문무대왕 수중릉의 전설이다.

최민희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967년 5월 15일 오전 11시. 경주 동해안 해변 바윗돌 임시 제단 앞에서 한 무리가 바다를 향해 제(祭)를 올리고 있었다. 향을 한 다발 피우고, 정성 들여 준비한 산해진미를 제물로 차려놓고, 신라 토기 잔에 제주(祭酒)를 따라 올리고 나서, 독특하게 네 번 절을 올렸다. 실로 천 년 세월이 흐른 뒤에 대왕께 제를 올린 것이다. 이들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으로, 제례에 앞서 오전 10시쯤부터 한 시간가량 바다 가운데 있는 ‘대왕바우’라 불리는 바위섬에 올라 조사하는 시간을 보내고 온 참이었다.

커다란 바위섬 한가운데에는 넓은 반석이 놓여 있고, 주변은 깊게 파여 있을 뿐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물도랑도 나 있었다. 자연에 의해 이렇게 만들어졌을 리 만무하므로 영락없이 인공으로 조성된 바닷속 작은 호수였다. 반석은 맨드리하게 닳고 넓적한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무덤의 덮개돌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대원들은 동쪽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와 포말을 이루며 호수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잔잔해진 뒤에는 서쪽 물길을 따라 해안 쪽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지켜보았다.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해 모셔진 수중릉 대왕암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감은사 해안 이견대 아래에 대왕암이 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수중릉이라는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우현 고유섭 선생께서 대왕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경주에 가면 반드시 대왕암을 찾으라고 하신 가르침의 결과가 이렇게 문무대왕릉 재발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견대 이견대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30-1번지 대왕암은 1967년 7월 27일 ‘경주 문무대왕릉’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제158호)이 되는 행사를 열 수 있었다. 이 행사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수중릉이라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왕릉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를 기념해 현재 이견정 옆에는 ‘문무대왕 유언’비, 우현 고유섭 선생의 ‘대왕암’ 시비와 ‘나의 잊지 못하는 바다’ 비가 세워져 있다. 그 곁으로 초우 황수영, 수묵 진홍섭을 기리는 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문무대왕은 백제 온조왕조를 660년에 무너뜨린 태종무열왕을 이어 668년에 고구려 주몽왕조를 굴복시킨 다음, 한반도를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마저 이 땅에서 몰아낸 끝에 평화를 이룩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동해 바다 건너 저편에는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왜가 남아 있었다.

왜는 신라 초기에 자주 침범해 재물을 약탈하는 등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신라는 동해구(東海口)를 방비할 대책이 필요했다. 이런 절심함에 따라 문무대왕은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680년 돌아가셨다. 이를 이어받아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완공하고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친 문무대왕

감은사 금당 아래에는 용이 되신 아버지 문무대왕이 쉴 공간을 만들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익산 미륵사 금당과 마찬가지로 미르 즉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시설로 이해하면 될 일이고, 미르는 또한 용이므로 이런 전설이 전해지게 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뤄 백성들에게 전쟁이 없는 평안을 가져다준 임금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문무대왕의 이 같은 마음 때문에 동해안에는 대왕신앙이 성행해 울산에도 대왕암이 있고, 동해를 건너 일본에서도 대왕암을 남기고 있다.

이곳 감은사에는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석탑을 동서에 쌍으로 조성했다. 3층탑은 삼층 몸돌을 제외한 기단부와 탑신부를 모두 조립식으로 했다. 유일하게 통돌로 된 3층 몸돌 윗면에 긴 네모 홈을 파고, 여기에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장치를 두었다. 목탑에서는 지면에 있던 사리장치가 맨 꼭대기로 올라간 것이다. 이들 동서탑에서 나온 사리장치는 통일신라의 우수한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아주 빼어난 작품이다. 이곳 감은사에서 시작된 신라 3층석탑은 이후 고려시대까지도 유행했다.

신문왕은 어느 날 동해에 바위섬 하나가 떠온다는 보고를 받는다. 직접 동해구 이견대로 행차해 바라보니, 과연 바다 한가운데 거북처럼 생긴 섬 하나가 떠 있고, 거기에는 대나무가 서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이면 하나가 되었다. 임금이 배를 타고 섬에 올랐더니, 용이 옥대(玉帶)를 바쳤다. 용왕이 보낸 옥대를 얻고, 또 대나무를 벤 다음 서라벌로 향했다. 중간에 만난 왕자가 옥대의 비늘 하나를 떼어 물에 던져 넣으니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는데 이곳을 용연(龍淵)이라 한다.

감은사지 석탑 감은사지 석탑

궁에 돌아와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영험하기가 그지없어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하였다. 월성 천존고에 보관한 이 피리를 불면 신이(神異)한 일이 일어났다. 쳐들어오던 적이 물러가고, 유행하던 질병이 나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장마에 날이 개며, 폭풍우 비바람이 멎고, 거센 파도 물결이 가라앉았다. 심지어 적에게 잡혀간 부례랑이란 화랑을 구해온 것도 이 만파식적이었다.

동해구에서는 이렇게 용왕이 된 문무대왕이 보내주신 옥대를 얻고, 제석천의 아들이 된 김유신 장군과 대왕이 함께 주신 대나무로는 만파식적이라는 신비로운 피리를 얻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얻은 두 보물 가운데 하나인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 검은 옥대는 신문왕의 권위를 세워주었으리라. 이미 신라에는 진평왕이 상제로부터 받은 옥대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통일전쟁의 두 영웅인 문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전한 대나무는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더없이 신이한 피리였으니, 이 또한 신라의 보물인 것이다.

옥대와 만파식적

이렇게 문무대왕께서 계신 수중릉 대왕암과 왜병을 막는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만든 감은사가 있고, 대왕암을 바라본 이견대까지 함께한 이곳 동해구는 신라에서 더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신문왕이 행차하던 시절에는 해수면 변동으로 지금처럼 바닷물이 빠지고 강물이 흐르는 지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토함산 동쪽 해안을 지켜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이곳을 기억하면서 둘러보면 좀 더 의미 있는 해파랑길이 되리라 생각된다.

문무대왕암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리를 가면 천연기념물(제536호)인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이 나온다. 전국에 주상절리는 많지만, 가까운 포항 달전 주상절리처럼 대부분 수직으로 발달한 단순한 형태이다. 하지만 이곳 양남 주상절리군에는 부채꼴이라는 희귀한 모습의 주상절리가 형성되어 있다.

이견대에서 본 일출. 이견대에서 본 일출.

그렇다고 이곳에는 부채꼴 주상절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서 진리항에서 읍천항까지 1km가 넘는 구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주상절리가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을 뿐 아니라 수직으로 서 있거나 옆으로 기울어진 주상절리 등이 뒤섞여 있다. 해안에서는 현무암, 안산암으로 이뤄진 주상절리가 너무나도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는 주상절리를 구경거리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 암석학 내지 지질학을 학습하는 자연학습장으로 대하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된다.

주상절리에 대해서 미리 조금은 알아보고 현장에서 관심을 갖고 관찰한다면 제대로 된 학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콜로네이드(나란히 선 돌기둥)들 가운데 잘 발달한 엔터블러처(복잡하게 얽혀 있는 돌기둥의 끝부분)들을 이곳저곳에서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더하여 이곳에서는 해안선을 이루는 제1해안단구와 탐방로로 사용되는 제2해안단구가 잘 발달해 있다. 국도를 지나 산 위로 올라가면 제3해안단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하서지 봉수대 유적이 남아 있다.

자연과학으로 본 수중릉의 정체

여기서 한 가지 짚어봐야 할 일은 대왕암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기록을 존중해 문무대왕을 대왕암에 장례 지낸 것으로 이해해왔다. 하지만 최근 자연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 달라지고 있다.

먼저 대왕암 가운데 놓여 있는 반듯한 돌인 반석은 밖에서 가지고 들어와서 설치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1993년 6월 대왕암에 올라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반석과 주변 바위의 암질은 다르지 않았다. 반석은 옆에 있는 바위에서 일부가 떨어져 오랜 세월 마모되면서 물속에 잠겨 있었으니 작은 틈새(절리)가 생기지 않았지만, 주변의 바위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무수히 많은 틈새가 생겨 겉보기에 차이가 생겼던 것이다. 다음으로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반석 주변에서 잔잔해진 다음 빠져나가는 서쪽에 물도랑처럼 형성된 부분을 인공으로 조성한 정 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인공의 흔적으로 인정할 만한 뭔가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감은사 터 감은사 터

올해 5월 15일이면 대왕암이 문무대왕의 수중릉임이 밝혀진 지 꼭 50년이 된다. 현대에 와서 과학이라는 눈으로 실체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처럼 분명 ‘동해구 바위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정말 왕릉일지도 모른다는 점 등에서 신비로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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