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

영화 ‘사도세자’에서 영조(송강호 분)의 모습.

영화 ‘사도세자’에서 영조(송강호 분)의 모습.

힘의 논리를 부도덕하게 보는 전통이
조선 왕조를 파멸로 이끌었다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려면 당파의 힘을 월등히 뛰어넘은 강력한 왕권이 있어야 했지만 뛰어난 임금이었던 영조와 정조조차 그럴 힘이 없었다. 그래서 당쟁을 극복하기 위한 탕평책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것이 조선 왕조의 불행이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롭고 불안해서 다른 사람들과 모여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모이기만 하면 둘로 혹은 넷으로 쪼개져 싸우기 시작한다. 통합이 분열을 낳고, 사랑이 싸움을 낳는 셈이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나 연인이 되고 나서도 그다음에 하는 일 또한 필시 싸움이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싸움판이다.

분열과 싸움의 원인은 “내가 옳다” 혹은 “우리가 옳다”는 생각에 있다. ‘나’ 혹은 ‘우리’ 중심의 생각, 다시 말해 ‘내’가 혹은 ‘우리’가 잘났다는 바로 그 생각이 분열과 싸움을 낳는다.

그렇다고 분열과 싸움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로 잘난 체하기 경쟁은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다. 역사와 문명은 전쟁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나’ 또는 ‘우리’가 옳다는 확신

분열과 싸움을 굳이 권장할 필요는 없다 해도 도덕의 눈으로 무조건 비판만 하는 것은 유치하다.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걸 나무라서는 안 된다. 분열과 싸움은 도덕적 선도 아니고 도덕적 악도 아니다.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둘러싸고 싸움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도무지 비현실적이다. 당쟁에 대해 도덕적 잣대부터 들이대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당쟁 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당쟁은 자연스러운 정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당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느냐이다. 당쟁이 조선 사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지겹도록 싸움만 하고 현실적으로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다면 그때는 비판해도 좋을 것이다. 싸움을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도덕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덕의 눈 대신 현실과 실용의 눈으로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영조와 정조가 당쟁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탕평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당쟁의 근저에는 권력, 토지, 명예, 돈 등 현실적 이익을 노리는 가문과 학파와 당파의 각종 이기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기심만으로는 당쟁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당쟁에는 이기심을 넘어서는 이념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기심을 넘어 숭고한 이념을 추구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래서 복잡하다.

영조의 어진(초상화).영조의 어진(초상화).

그런데 숭고한 이념이 속물적인 이기심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당쟁 또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만약 이해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에만 충실한 경우에는 뜻밖에도 싸움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이익만 생각한다면 타협을 통해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서로 적당히 나누고 싸움을 피할 수 있다. 설령 타협이 잘 안 되어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힘으로 제압해 싸움을 빨리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이기심보다 이념적 동기를 앞세우게 되면 싸움은 불가피해질 뿐만 아니라 장기화될 위험이 커진다. 숭고한 이념을 추구한다고 확신할 경우에 ‘나’ 혹은 ‘우리’가 옳다는 확신이 견고해져 남들과의 타협이 어려워지고, 힘이 약해 패배하더라도 승복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주역들은 대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이자 노비주였지만 권력 추구를 업으로 하는 정치꾼도 아니고 경제적 이익에 눈먼 시정잡배도 아니었다. 그들은 공맹과 주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이념 지향의 점잖은 도학군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은 ‘우리’는 옳다는 아집이 누구보다 확고했다. 바로 이것이 붕당이 형성되고 당쟁이 시작된 진짜 원인이었다.

퇴계나 율곡과 같은 도학군자들은 당쟁이란 소인배들이나 하는 ‘나쁜 짓’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16세기 후반 훈구세력을 척결하고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붕당을 만들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이 싸움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거의 같은 패턴으로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도학군자들은 싸움을 하더라도 주먹으로 하지 않고 말로 했다. 말로만 하는 싸움은 끝을 내기가 쉽지 않다. 주먹은 한 방이면 상대방을 바닥에 눕힐 수 있지만 말은 아무리 독해도 상대방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싸움에서는 한번 지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해보면 새 논리를 개발하기가 어렵지 않다. 당쟁이 격화되면 간혹 공권력을 동원해 옥사를 일으켜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당쟁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수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다. 권좌에서 물러나더라도 죽을 염려가 별로 없으니 말로 하는 도학군자들의 당쟁은 겁도 없이 대를 이어 끈질기게 계속될 수 있었다.

백성의 삶과 별 상관없던 조제보합론

조선시대 당쟁은 어떤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왔는가. 조선의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켰는가. 도학군자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했지만 당쟁 덕에 백성의 삶이 개선되었는가. 이런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다음에도 당쟁은 더 격화되었지만 그 결과는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숭상하는,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철저한 유교국가의 등장뿐이었다. 각 당파들이 유교 윤리와 주자학의 가르침을 근거로 상호 비판을 거듭하다 보니 백성의 삶과는 무관하게 조선의 유교화 내지 주자학화(化)만 자꾸 심화돼갔다.

탕평에 대한 요구는 당쟁이 시작되자마자 싸움을 나쁜 짓으로 보는 도학군자 자신들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파에 구애받지 말고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해 사림을 통합해보자는 율곡의 이른바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 즉 조정과 통합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정조는 탕평책의 하나로 퇴계의 학덕을 기리는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과를 실시했다.정조는 탕평책의 하나로 퇴계의 학덕을 기리는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과를 실시했다.

하지만 율곡 자신부터 서인의 당파성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령 당파성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의 조제보합론은 백성의 삶과 별 관련이 없는 도학군자들끼리의 조정과 통합에 지나지 않았다. 끼리끼리 갈라먹기 식의 조제보합보다는 어떤 정책이 백성을 위해 가장 좋은 정책인가를 두고 필사적으로 싸웠더라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대였다. 분열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 도학군자들의 정책 대안은 늘 허공에 뜰 수밖에 없었다. 주자학적 이념의 핵심에는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라는 맹자의 성선설이 있는데, 도학군자들은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성선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당착을 범했다. 착한 본성에 대한 일체의 외적 강제는 모두 도덕적 악이기 때문에 성선설에 100% 충실하다면 국가도, 국왕도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무정부주의의 낭만에 빠질 수 있다.

‘왕권 강화=패도(覇道)’라는 인식

분열과 싸움이 불가피한 세상의 현실 속에서 쓸데없는 당쟁을 극복하고 공평한 인사를 하려면 왕권 강화가 유일한 해법이었지만 도학군자들은 임금에게 도덕적 수양만 요구할 뿐, 왕권 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도덕적 수양의 요구는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를 강화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킬 공산이 크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왕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권력밖에 행사하지 못했다. 왕권이 약하니 신권이 강해지고 신하들 간의 당쟁이 빈발할 수밖에 없었다. 도학군자들은 조정에 들어가 왕의 신하가 된 다음에도 주자학의 이념에 따라 신하가 해서는 안 될 월권 행위를 자행했다. 붕당을 만들고 당쟁을 벌이다가 구미에 맞지 않는 왕이 있으면 반정이란 명분으로 내쫓기도 한 게 바로 그것이다.

이념을 명분으로 하는 도학군자들의 월권적 당쟁을 잠재우는 대신 생산적인 싸움을 자극해 백성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왕권 강화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왕권강화론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순자의 성악설에 근거해 폭력까지 용인해야 하므로 자칫하면 패도(覇道)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탕평비. 영조가 직접 글을 써서 세운 비다.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탕평비. 영조가 직접 글을 써서 세운 비다.

세자 시절부터 도학군자로 교육받아온 조선의 왕들 역시 왕권 강화를 대놓고 선언할 처지가 아니었다. 영조와 정조는 그 대신 탕평을 통치의 대원칙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 두 탁월한 임금마저 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당파들 간의 이해관계를 절충하는 조정자의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려면 당파의 힘을 월등히 뛰어넘은 강력한 왕권이 필수적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그런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당쟁을 극복하기 위한 탕평책은 모두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조선 왕조의 불행이었다. 왕권 강화는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힘의 강화를 뜻한다. 국가의 힘이 강해야 특권층의 발호를 막고 힘없는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힘의 논리를 도학군자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힘의 논리를 부도덕하게 보는 전통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되고 있다. 아름다운 이념이 아름다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이념보다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추악한 현실이 더 중요하고, 이 추악한 현실 속에서는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조선 왕조의 실패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엄숙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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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강대 철학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관장, 한국학대학원 대학원장 역임. 저서 <주자학을 위한 변명>, <인문학, 철학, 그리고 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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