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 간직한 법궁
서울 창덕궁
<사진> 창덕궁 인정전의 설경.
창덕궁은 조선의 고궁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발굴·보호·보존하기 위해 1972년에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을 채택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등재를 시작으로 모두 12점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유산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편집자>
| 양영훈 여행작가 |
조선 500년의 도읍지였던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등의 고궁이 있다. 그중 법궁(法宮)은 경복궁이다. 이궁(離宮? : 왕이 행차할 때에 머물던 별궁)인 창덕궁은 조선의 한양 천도에 맞춰 1405년(태종5)에 완공됐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25), 도성 내의 여러 궁궐과 함께 소실됐다. 복구 공사는 전쟁이 끝난 뒤인 1607년에 시작해 1610년(광해군 2) 마무리했다. 궁궐 가운데 맨 먼저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때부터 창덕궁은 고종 시절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0여 년 동안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해왔다.
<사진> 애련지 주변의 느티나무 고목과 애련정
창덕궁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때 큰 화재를 겪었다.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렸다. 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등의 전각을 다시 짓는 공사는 1647년(인조25)에야 완공됐다. 이처럼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를 겪었는데도, 오늘날의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손꼽힌다. 건물의 배치, 자연과의 조화가 탁월하다는 점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창덕궁이 조선의 여느 궁궐과 가장 차별되는 공간은 후원이다. 다양한 정자와 연못, 화초와 수목, 기암괴석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흔히들 쓰는 ‘비원(秘苑)’이라는 말은 대일 항쟁기에 일본인들이 폄훼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정원’이라는 뜻의 ‘금원(禁苑)’, 또는 ‘정전(正殿)의 북쪽에 자리잡은 정원’이라고 해서 ‘북원’이라 불렀다.
<사진> 소박하고 단촐한 사대부 집의 형태를 갖춘 연경당.
금단의 영역 후원
오랫동안 창덕궁 후원은 ‘비밀의 정원’이었다. 1976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28년 동안이나 일반인들은 존덕정, 옥류천 권역을 관람할 수 없었다. 문화재와 생태계 보존을 위한 특단의 조처였다. 지금도 약 90분 동안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는 제한 관람만 가능하다. 그 덕택에 창덕궁 후원은 녹음 우거진 여름과 오색 단풍이 현란한 가을날의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창덕궁과 후원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때는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철이다. 자연과 완벽하게 하나 되는 한옥의 매력을 누구나 실감하게 마련이다.
창덕궁 특별 관람 코스의 출발지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잇는 함양문 앞이다. 여기서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서면 부용지 권역에 들어선다. 부용지는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의 조형 원리에 따라 조성된 연못이다. 연못 주변에는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등의 건물이 자리 잡았다. 그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화당은 왕실의 휴식 공간이었다. 그 앞쪽의 ‘춘당대’라는 마당은 정조 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됐다. 열 ‘十(십)’ 자 형태의 독특한 정자인 부용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진> 어전회의실로 사용된 희정당 앞의 소나무.
부용정과 마주 보고 있는 주합루는 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정조 즉위년(1776)에 건립한 2층 건물이다. 이곳에 설치된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고, 조선 중기의 문예부흥을 이끈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의 실학자들이 활동하던 공간이었다.
영화당을 뒤로하고 조금 더 걸어가면 불로문과 애련지 앞을 지난다. 큰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불로문은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애련지는 연꽃을 어여삐 여겼던 숙종 임금 때에 만들어진 연못이다. 북쪽 연못가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아담한 애련정이 있다.
<사진> 부용정과 주합루. 부용정과 마주 보는 주합루는 정조 때 규장각 건물로 사용됐다.
애련지 앞을 지나면 금세 또 하나의 연못이 나타난다. 한반도 형태를 닮았대서 ‘반도지’라고도 불리던 관람지다. 그 주변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가진 관람정이 있다. 그리고 바로 위쪽에는 정자 건물치고는 대단히 크고 화려한 존덕정이 있다. 존덕정을 지나 옥류천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이다. 낙엽이나 눈이 수북하게 깔린 날에는 마치 한 폭의 풍경화 속을 걷는 것처럼 운치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외지고 풍광이 아름다운 옥류천 권역은 많은 임금이 유달리 사랑했던 공간이다. 특히 소요암이라는 바위를 깎아 물길과 폭포를 만들게 한 인조는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여행 정보
관람 안내
창덕궁 후원의 1~2월 특별관람은 하루 6회(10:00, 11:00, 12:00, 13:00, 14:00, 15:00) 실시한다. 1회당 인원은 100명(인터넷 예약 50명, 현장 매표 50명)이다. 관람료 8000원(창덕궁 입장료 3000원 포함), 관람시간 90분. 후원 입구(함양문)→부용지→불로문, 애련지→관람지, 존덕정→ 옥류천→연경당→돈화문 순으로 이동
숙식
창덕궁 돈화문에서 약 350m 거리에 실속형 비즈니스 호텔인 이비스앰배서더인사동호텔(02-6730-1101)이 있다. 파인포레(0505-464-1001)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덕궁과 이웃한 한옥 게스트하우스다.
돈화문의 맞은편 골목에는 홍어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순라길(02-3672-5513)이 있다. 돈화문 건너편의 골목에 있는 브리스토차우기(02-915-0105)는 예약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찾아가기
지하철 안국역(3호선) 3번 출구에서 약 300m, 종로3가역(1·3·5호선) 6번 출구에서 약 600m 거리. 창덕궁 매표소 부근에는 관람객을 위한 전용 주차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