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아카이브

제18기 국내지역회의 한용운 편찬실장은 “사전 편찬가는 낱말 뜻풀이를 하는, 사소하고 지루한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다”며 “20여 년 넘게 사전 편찬 작업을 이어가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혹독한 시간 견뎌 여기까지…
“정열적으로 숨은 말 탐험하고 싶다”

겨레말큰사전은 민족의 언어 유산을 집대성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다. 분단과 체제와 사람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 거대한 작업의 중심에는 한용운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이 있다.

사전 편찬가의 연구실은 15년째 서울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 구석에 있다. 연구실 책상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남한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이 여러 권 쌓여 있다. 고군분투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진, 낡고 오래된 고서 같았다.

손때 묻은 낡은 조선어말대사전을 들춰보니 처음 접하는 낯선 단어 ‘직통생’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급 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는 학생이란 뜻의 직통생은 북한에만 존재하는 낱말이다. 남한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 재수생이 대표적인 사례. 재수생은 남한에서만 사용한다. 직통생과 재수생은 겨레말큰사전에 수록될 예정이다.

남북 언어를 한곳에 담는 작업이 한창인 이 방의 주인은 한용운(52)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이다.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분단 73년 동안 달라진 남북의 어휘 이질화를 해소하고, 남북의 언어를 총망라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사전을 만들자는 뜻에서 2005년 시작됐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한 언어 통일을 목적으로 남북한 국어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드는 최초의 국어대사전인 셈이다

‘살림꾼’으로 통하는 한 실장은 2005년 2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15년째 이곳에서 편찬 실무를 맡아오고 있다. 그는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뮈엘 존슨의 말을 언급하면서 “사소한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사전 편찬가라는데, 내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한 실장의 삶은 그의 작업 방식을 닮았다. 낱말 하나하나 일일이 뜻풀이를 하는, 사소하고 지루한 일을 쉼 없이 이어가는 사전 편찬처럼 그의 15년 시간도 고뇌와 인내의 연속이었다. 남북 교류사업은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 좋을 땐 급물살을 타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경색이 풀릴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노무현 정부 때 북한과 공동 편찬 사업을 시작했지만, 편찬 작업이 제대로 진행된 것은 2009년까지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5년 동안 총 20회의 남북 공동 편찬회의와 네 차례의 공동 집필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5·24 대북제재 조치로 편찬 작업이 중단돼 무려 5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행히 2014년 들어 남북관계가 다소 개선되면서 그해 7월 중국 선양에서 남북 편찬가들이 만남을 가졌고, 평양에서 편찬회의가 열리면서 사업이 정상화됐다.

하지만 겨레말의 겨레 얼을 잠깐 느껴보았을 뿐이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등으로 2015년 12월 이후 회의가 중단됐다.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온 편찬 사업은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재조명을 받으면서 다시금 속도를 내고 있다. 2018년 11월 27일 남북 겨레말큰사전 편찬 실무자들이 중국 선양에서 3년 만에 실무회의를 가진 것이다. 남한과 북측 모두 각각 실무자 3명씩 총 6명이 참석했다. 이날 자리한 남한 실무자 중에는 한 실장도 포함됐다.

“3년 만에 북측 사람들을 만났는데, 담당자가 바뀌어 있었어요. 북측 실무자 3명 중 2명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죠. 남한은 민간에서도 사전을 편찬하지만, 북측에서는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에서 전담합니다. 사회과학원 직원은 우리로 치면 공무원에 해당하지요. 이번에 만나보니 언어학연구소장도 새로 바뀌었더군요.”

편찬 재개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린 것은 남한만이 아니었다. 북측도 분단 73년의 세월을 겪는 동안 달라질 대로 달라진 남북한 어휘를 이어주고, 더 이상의 분화를 막는 일은 남북 철도를 잇는 일만큼 절실한 일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한 실장은 “실무회의를 통해 2019년 2월쯤 남북 공동 편찬회의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현재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작업 진척률이 78%에 달한다. 겨레말큰사전 편찬 지침과 사전에 수록할 올림말 30만 개 선정작업은 이미 마무리했다. 올림말의 뜻풀이는 남한, 북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 해외 동포들이 쓰는 뜻까지 세 종류를 싣는다. 각 지역의 시, 소설, 수필 등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실제 사례도 담는다.

현재 남한은 올림말 17만 개의 뜻풀이 작업을 완료했다. 북측의 13만 개 올림말 작업은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한 실장은 “북측이 이 작업을 거의 완료했다고 하는데, 남북공동 편찬회의 때 만나봐야 북측의 작업 진척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낱말 자체에 집중… 체제 다른 건 문제되지 않아

사전 편찬에는 50여 명의 남북 언어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남과 북에서 사전 편찬 작업에 경험 많고 정통한 사람들이다. 남북 공동 편찬회의에 들어서면 남한 사람 대 북한 사람이 아닌 사전 편찬가 대 사전 편찬가로 만난다. 초창기엔 북측 사람이라는 의식 때문에 말이나 몸가짐이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15년째 함께 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고, 그 만남이 짧고 귀하기에 하나라도 더 논의하려고 때로는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한다.

김덕룡 수석부의장이 7월 17일 개최된 광주지역회의에 참석해 격려사를 하고 있다. 북측 소설책을 잔뜩 모아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 편찬사업회 자료실.

“보통 북한 편찬가들과 만나 사전 편찬 논의를 한다고 하면 이념이 달라 부딪칠 거라 생각하지만, 사전 편찬가들은 이념적인 뜻풀이는 빼고 낱말 그 자체에 집중해 사전을 만들고 있어요. 정치 체제가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제도적 차이 때문에 합의할 일이 많이 생기지요. 북측 편찬위원이 남측의 세금 관련 용어가 너무 많으니 대표적인 것 몇 개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빼야 한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직접세, 간접세 등은 사전에 넣고 특별소비세, 간접국세 등은 수록하지 말자는 의견을 제기했을 때 결국 하나하나 협의해 의견을 모았답니다.”

‘도보다리 벤치회담’은 4·12 남북 정상회담에서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명장면이다. 남북 두 정상이 연초록 봄 풍경 속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통역 없이 같은 언어로 서로 통하는 사이,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깨우쳐준 장면이었다. 그러나 한 실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일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남북의 의사는 말이 안 통해 같은 수술실에서 수술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덕룡 수석부의장이 7월 17일 개최된 광주지역회의에 참석해 격려사를 하고 있다. 북한 발행의 대국어사전인 ‘조선말대사전’.

왜 그럴까.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수록돼 있는 단어라고 해서 어감과 쓰임새가 같은 것은 아니다. 일례로 ‘늙은이’는 남한에서 노인을 낮춰 부르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북한에선 일반적인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 ‘소행’도 남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지만 북한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만일 북한사람이 “소행이 얌전하다”고 말했다면 이는 칭찬을 한 것이다. 남과 북이 상대의 말뜻을 정확히알기 위해서는 사전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전은 민족의 이력서와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이력서에 나와 있듯이 단어에도 이력이 있어요. 사전은 한 단어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가 기재돼 있답니다. 남북 분단 이전에 같은 뜻으로 쓰였던 낱말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용되면서 뜻이 달라진 것들이 많지요. 전문용어의 경우 65%가 달라요. 컴퓨터, 전산, 식물, 동물, 역사, 수학 등 언어가 달라 북한 사람이 남한의 사전을 참고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남한도 마찬가집니다. 각기 만든 사전을 참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남북 사전 편찬가들이 만나서 함께 사용하는 사전을 만들자는 의미로 이 작업을 하게 된 거죠.”

김덕룡 수석부의장이 7월 17일 개최된 광주지역회의에 참석해 격려사를 하고 있다. 한용운 편찬실장은 “겨레말큰사전의 목적은 남북 언어 통일에 있다”며 “남북 언어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기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겨레말큰사전의 목적은 남북 언어 통일에 있다. 남북의 어휘 차이를 정리해서 향후 통일시대의 어문 규범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표기법을 마련하고 사전을 편찬해 광복 이후 큰 어려움 없이 교과서를 편찬하고 공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겨레말큰사전이 통일 전후로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아쉬움도 있다. 2018년 12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 개정안 통과로 사업 유효기간이 2022년 4월까지 3년이 연장됐다. 한 실장은 “교정·교열은 사전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3년이면 1차 합의 원고에 대한 교정·교열만도 빠듯하다”며 아쉬워했다.

남북 언어 정책 협의기구 시급

겨레말큰사전은 국가적 과업이지만 한 실장 그 자신도 꼭 완성해야 하는 과업이다. 그는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 작업을 계기로 본격 사전 편찬가의 길로 들어섰다. 30대 후반에 시작한 그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이 마무리되면 50대 중반에 접어들게 된다. 겨레말큰사전은 사전 편찬가로서 그가 전성기를 다 바친 사전인 셈이다.

“처음에는 과연 사전이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부담감에 남몰래 신음하기도 했어요. 새로운 편찬 지침으로 새로운 어휘를 만난다는 즐거움과 역사에 길이 남을 국가사업을 한다는 자긍심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오래전 중국 선양에서 회의를 마친 후 저녁 만찬장에서 만난 북측 사전 편찬가 정순길 선생님이 제 손을 잡으면서 ‘어쩌면 사전을 못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꼭 완성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그래도 다시 시작하는 봄이다. 마침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남북 언어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겨레말큰사전이 편찬되면 이 기구는 해체될 겁니다. 남북 언어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기구가 시급해요. 오늘의 남북 언어학자들의 교류가 그 토대가 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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