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행 통일 여행

철원 DMZ 안보 견학에 참여한 중년 부부가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와 북한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평화문화진지 전경

서울 도봉구 평화문화진지

분단이 남긴 유산 위에
문화적 총격을 가하다

1969년 만들어진 대전차 방호시설 일부를 허물고 그 위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문화 공간. 서울 도봉구 도봉동 6-5번지에 들어선 특별한 공간에 시민과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진하게 녹아든 이 공간에는 평화통일을 바라는 시민의 바람과 예술가의 일상이 뒤섞인다.

‘절경’. 누구든 평화문화진지의 첫인상은 여기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곳은 서울의 북단 도봉산과 수락산, 불암산과 북한산이 사방으로 둘러싼 땅에 들어서 있다. 바로 그 옆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남쪽에는 수목원인 서울창포원 공원이, 북쪽에는 푸른 축구장 다락원체육공원이 자리한다.

천혜의 자연 경관에도 독특한 건축 구조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군더더기 없이 단조로운 1층짜리 건물 5개 동이 일렬종대로 서 있다. 평화문화진지는 서울시가 마포구 석유비축기지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재생형 문화 공간이다.

방호시설, 평화와 창조의 공간이 되다

평화문화진지는 사실 전쟁과 분단이 낳은 유산이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들이 서울로 침투했다.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 소속 침투조 31명이었다.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이들 중 28명이 우리 군경 합동 수색진의 소탕작전 끝에 사살됐다. 2명은 도주했다. 유일한 생포자였던 김신조 씨가 “박정희 멱 따러 왔다”는 말을 남겨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사건 후 대북 경계태세가 강화됐다. 이듬해인 1969년 서울 북쪽 경계인 도봉구 도봉동 6-5번지 일대에 대전차 방호시설이 들어섰다. 5480㎡ 땅에 길이 250m, 3개 층으로 아파트 형태로 지었다. 특이하게 1층에는 군사시설을, 2~4층엔 주거시설을 만들었다. 군사시설이지만 주거공간의 외피를 쓴 셈이다.

유사시 신속하게 건물을 폭파해 북한군 탱크가 서울 도심으로 내려오는 길을 차단하고자 군사시설을 민간시설로 위장한 것이다. 당시 이곳은 북한군 탱크가 경기도와 강원도 철원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의 하나였다.

서울시는 1972년 이 건물의 아파트 부분만 인수해 도봉시민아파트로 만들었다. 1층은 벙커로, 2~4층은 아파트로 썼다. 한때 180가구가 살았다. 2004년 건물이 노후 판정을 받아 2~4층의 아파트는 철거됐다. 이후 13년 동안 1층 군사시설만 덩그러니 흉물로 남았다.

2010년대 들어 주민 사이에서 이 공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저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만 보지 말고 공간의 상징성과 결부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 대두된 것이다. 건물은 군사시설과 주거공간의 단순한 결합체가 아니라 전쟁과 분단 이라는 상처 위에 평화와 통일이라는 새살이 섞인 문화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시설에 문화를 입히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도봉구가 2013년 9월부터 대전차 방호시설 재생에 대한 공감과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주민 설명회를 열었다. 40회의 설명회 끝에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안이 나왔다. 서울시는 이곳을 ‘2016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고, 국방부 동의를 받아 2016년 12월 공사에 들어갔다. 평화문화진지는 1년 가까운 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10월 31일 개관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통일로 가자는 뜻을 담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공사 중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2017년 초 공사 중 건물 2동과 3동 사이에 땅굴이 발견됐다. 지도에도 없던 지하통로였다. 시는 이를 시민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잠정 중단했던 공사를 재개했다. 땅굴 위에는 평화광장을 만들고, 국방부에서 대여한 전차(47톤) 1대와 장갑차(8.4톤) 1대를 놓았다. 분단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교육용으로 전시한다.

1975년 3월 강원 철원군 북쪽의 군사분계선 남쪽 900m 지점에서 발견된 제2땅굴 입구. 서울시가 1972년 매입하던 당시 도봉시민아파트 모습.

평화문화진지는 분단의 상처를 문화로 치유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옛 대전차 방호시설이라는 역사성과 장소성 위에 현재 서울을 살아가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 향유 공간이 접목된 것이다.

연중무휴 24시간 무료 운영

평화문화진지는 연면적 1902㎡(576평)로, 1층짜리 건물 5개 동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각각 시민동, 창작동, 문화동, 예술동, 평화동으로 불린다. 과거 벙커로 쓰이던 1동(시민동)부터 5동(평화동)까지 연결되는 복도를 개조해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주로 예술가와 주민을 위한 공방과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차세대 예술가를 위한 스튜디오, 복도형 전시실, 세미나실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연극, 무용,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평화진지의 전시실 및 커뮤티니 공간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문을 연다. 입주 작가 공방과 휴게 공간은 연중무휴 24시간 운영된다.

5개 동으로 구성된 평화문화진지 안에 들어서면 방호시설의 지하벙커가 깊숙한 목젖을 드러낸다. 성인 어른 한 명이 들어가려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야 하는 병사용 이동 통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총 길이 250m 복도 곳곳에는 청년 작가들의 전시 작품이 걸려 있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눈으로 작품을 훑다 보면 이곳이 과거 군사시설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전선너머 북한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소총 사격구에는 ‘Communication(소통)’ ‘Coexistence(공존)’라고 쓰인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75년 3월 강원 철원군 북쪽의 군사분계선 남쪽 900m 지점에서 발견된 제2땅굴 입구. 북한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소총 사격구(왼쪽). 한 시민이 평화문화진지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고 있다.

평화문화진지 동쪽 끝에는 높이 20m 전망대가 있다. 오래전 북한군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전망대로 올라가 평화문화진지의 동서남북을 한눈에 조망한다. “전시 상황에는 이곳도 원래의 기능으로 복귀합니다. 이곳 명칭에 ‘진지’가 빠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평화문화진지 담당자 이율빈 씨의 설명이다. 한반도에 총성이 울리면 예술 작품이 도열했던 전시 복도는 다시 병사들이 뛰어다니게 된다. ‘소통’과 ‘공존’이 새겨져 있던 사격구에도 다시 총신이 걸리게 될 것이다. 이런 비극이 초래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이곳엔 독일 베를린시로부터 기증받은 실제 베를린장벽이 탱크의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다.

DMZ 철책선 바로 앞에 세워진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북한 측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들. 국방부에서 대여한 M48A3K 전차.

평화문화진지 최소영 총괄 매니저는 시민들의 바람으로 이곳 평화문화진지의 의미를 대신한다. “분단의 아픔이 서린 곳, 서울 북쪽 끝, 역사성과 장소성이 내재된 대전차 방호시설을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바꿔보려는 시민들의 바람이 있었습니다. 대전차 방호시설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한 채 평화문화진지는 공간의 역사, 시민의 문화, 생태적인 삶을 위해 시민들과 함께 문화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옛 대전차 방호시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평화문화진지를 거닐 때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마침내 방호시설이라는 본래 목적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바랐던 이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청년 작가들을 위한 작업실과 전시실, 체험 프로그램이 열리는 공방, 공연장, 커뮤니티 공간이 들어선 평화문화진지는 회색빛 진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청년 작가에게 영감 불어넣는 작업실

요즘 평화문화진지에서는 시민과 소통하는 인문예술 콘서트가 한창이다. 3·1 만세운동 뒤인 1923년 무렵 허탈한 마음의 대중에 퍼져 불리기 시작한 한국 최초의 가요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그리움을 표현한 군가 메들리를 함께 부른다. 또한 이곳에 둥지를 튼 1기 청년 작가들을 중심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도봉구의 터줏대감인 주민과 소통하며 전쟁과 분단, 평화에 이르기 까지의 이야기를 나눈다.

평화문화진지가 있던 자리는 조선시대 당시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운영되던 숙박시설 ‘다락원’ 터이기도 하다. 다락원은 교통상의 요지에 인접하고 있어 큰 장이 들어서곤 했다. 평화문화진지 측은 다락원에서 열리던 ‘다락장터’에서 차용한 2018년 버전의 신개념 ‘다락장’을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개최한다(비가 오면 취소).

건물 곳곳마다 분단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평화문화진지에 작가들이 들어오면서 공간은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간다. 동시에 청년 예술가들은 이 공간에서 특별한 힘을 얻기도 한다. 1기 입주 작가인 이해반(28) 씨는 이곳이 출입이 제한되거나 사진 촬영이 금지된 구역을 회화로 표현하는 이 씨의 작업 세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1946년 북한 노동당이 지었으나 6·25전쟁 때 상당 부분 파괴됐다. 독일 베를린시에서 기증받은 베를린장벽(왼쪽).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평화문화진지. 저 멀리 도봉산이 보인다.

“이곳에서 작업을 해보니 평화문화진지는 굉장히 다층적인 곳이에요. 과거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곳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것이 이곳의 의미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에요. 역사적인 공간의 ‘어제’를 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문화 창작 활동을 통해 생생한 목소리를 나누는 경험은 청년 작가들이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작은 원동력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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