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7월 4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개최된 남북 통일농구경기에서 여자 평화팀과 번영팀이 혼합 경기에서 점프볼을 하고 있다. 6월 말 이후 현재까지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1면이 연일 김정은의 현지지도 관련 기사로 채워지고 있다.

김정은 현지지도로 본 북한의 전략

“경제 재건과 비핵화 맞물려 있지만
등 떠밀리듯 비핵화 않겠다”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매듭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2018년 들어서면서 매우 적극적인 대내외적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 중심엔 ‘비핵화’와 ‘번영’이 놓여 있다.

북한은 2018년 상반기에만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한 김정은 집권 이후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던 북·중 정상회담을 세 차례나 했다. 더욱이 ‘철천지원수’로 여기던 미국과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대내적으로도 북한은 지난 4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소집해 국가 발전전략을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으로 전환했다.

6월 말부터는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한 김정은의 현지지도를 통해 경제 재건 의지를 더욱 분명히 표출했고, 그 과정에서 북한 경제의 속살을 대내외적으로 여과 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적어도 북한은 2018년 8월 현재까지 이러한 대내외적 행보를 통해 비핵화와 번영의 의지를 표명하는 데는 나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여전히 북한이 ‘비핵화와 번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2018년 들어 북한이 내딛고 있는 행보만 본다면, 북한은 여태껏 걸어온 길이 아닌, 걷지 않은 길로 나아가려 한다고 여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눈에 띄는 변화를 찾기는 어렵다. 북한의 비핵화를 놓고 세기의 담판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던 북·미 정상회담은 비핵화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머물렀고, 북·미 양측은 뒤이은 후속 실무회담을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이렇다 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사이 북한은 6·25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 해체 등의 조치를 취했고, 2015년 이후 3년 만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핵심은 역시 비핵화의 진전이다. 비핵화의 진전 없이는 경제 제재라는 족쇄를 풀지 않으려는 미국과 경제 재건을 위해 비핵화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은 북한 사이의 팽팽한 기 싸움이 결코 간단치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통미봉남’ 정책 한계 인식한 듯

북한의 비핵화 진전이 더딜수록, 이를 둘러싼 북·미 간의 치열한 공방이 거듭될수록, 이와 비례해 비관론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너무 비관하기엔 이르다. 비록 험난한 과정일지라도 여전히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고, 비핵화에 관해 북한이 전략적인 결단을 이미 내렸든 혹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든 한번 내던진 주사위를 거둬들이기엔 너무 늦었다.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북한이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에 관해 이해를 넘어선 독해이다. 2018년 1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서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올해에는 더욱 분발하고 전심전력해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찾아 할 결심을 가다듬게 된다”고 밝혔다.

이는 ‘수령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강조해오던 그간의 북한 통치 행태를 감안할 때 이례적 발언이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밖에 없는 북한 인민을 대상으로 한 신년사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자신의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때 까지만 해도 북한이 이후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 특사가 오가며 서서히 북한의 의도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지난 10여 년간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개선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난 4월과 5월에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것은 4월 27일에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한 지 불과 한 달만인 5월 26일 또다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사실상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교두보나 마찬가지였다.

5월 8일 랴오닝성 다롄의 휴양지 방추이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서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올해에는 더욱 분발하고 전심전력해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찾아 할 결심을 가다듬게 된다”고 밝혔다.

당시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고, 자칫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될 수도 있는 긴박한 시기였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이틀을 앞둔 지난 5월 24일, 2006년 10월(1차 핵실험)부터 2017년 9월(6차 핵실험)까지 사용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다. 비록 북한이 당초 공언한 것처럼 전문가 참관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비핵화 의지를 내비치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이틀 뒤인 5월 26일 전격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요컨대 북한이 남북관계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징검다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과거 북한이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활용했던 ‘통미봉남(미국과 대화하고 남한 정부와 단절하는 북한의 외교전략)’ 정책으로는 지금의 정세를 타개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정은 현지지도는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

이와 함께 주목할 점은 바로 중국과의 세 차례 정상회담 개최다. 첫 번째 회담이 3월 26일 중국 베이징에서,두 번째 회담이 5월 7〜8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서, 세번째 회담이 6월 19〜20일에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불과 3개월 동안 북한과 중국 사이에 세 차례 정상회담이 집중적으로 개최된 것은 김정은 집권 이후 소원해진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도 매우 이례적이다.

주의 깊게 볼 것은 회담이 개최된 시점이다. 특히 두번째 회담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중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회담이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국의 속내도 읽히지만,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를 활용해 미국과의 비핵화 담판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속내를 여실히 드러낸 회담이다. 북한의 이러한 의도는 어렵사리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한 직후인 6월 19일 김정은이 다시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세 번째 중국 방문을 마친 김정은은 본격적으로 내치에 집중했다. 6월 중순까지 파격적인 대외적 행보에 집중했다면 6월 말부터는 다시 대내적 행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6월 말 이후 현재까지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1면이 연일 김정은의 현지 지도 관련 기사로 채워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노동신문이 창간된 이래 지금까지 최고지도자의 현지지도를 이처럼 근 한 달 넘게 집중적으로 보도한 적은 없었다. 특히 지난 7월 17일자 노동신문은 파격 그 자체였다. 평소 6면이었던 지면을 12면으로 늘렸고, 그중 9개 면을 모두 김정은의 현지지도와 관련된 사진과 기사로 빼꼭히 채웠다. 6월 말부터 평안북도에서부터 시작된 김정은의 현지지도 강행군은 신의주와 양강도, 함경북도를 거쳐 원산, 황해남도 등 거의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한 지도를 놓고 보면 시계 방향으로 북한 전역의 생산 단위 곳곳을 샅샅이 훑고 있는 셈이다.

많은 외부 관찰자들은 북한의 이러한 의도가 대내적인 목적도 있지만, 대북제재 완화를 위해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 성격도 있다고 본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속도를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북·미 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전혀 타당성 없는 진단은 아니다.

북한은 이런 외부 관찰자들의 시각을 의식이라도 한듯 지난 8월 14일 노동신문 정론을 통해 “남에 대한 의존심은 국력을 쇠퇴 몰락시키는 사약이며 자력갱생만이 영원한 승리”라고 강조했다. 또 “어느 부문, 어느 단위에서나 금은보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민족자존이라는 드센 배짱과 각오를 가지고 자력갱생, 자급자족을 체질화하자”고도 주장했다.

이는 북한에서 이른바 ‘7월 6일 유훈교시’인 김일성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각 관료들을 소집해 개최한 ‘경제 부문 책임일군협의회’에서 한 발언을 떠오르게 한다. 이날 김일성은 “이때까지 우린 제재받고 살았지 안 받고 산 적 없어. 제재를 받고도 이만큼 사는데 제재하려면 똑똑히 하라우. 우리가 못 살게 뭐이가”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이날 회의에 참석한 내각 관료들에게 앞서 1994년 6월 북핵 위기를 중재하기 위해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5월 8일 랴오닝성 다롄의 휴양지 방추이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 북한은 지난 8월 14일 노동신문 정론을 통해 “남에 대한 의존심은 국력을 쇠퇴 몰락시키는 사약이며 자력갱생만이 영원한 승리”라고 강조했다

갈림길에 서 있는 북한

1994년은 물론 2018년 현재에도 북한은 여전히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일관되게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례로 지난 7월 2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7년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 결과’에 따르면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도인 2016년보다 3.5%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1997년 이후 20년 만에 최저 성장률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를 추구할수록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도와 압박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대북제재에 따른 수출입 감소가 북한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음이 이러한 수치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전략적 의도는 좀 더 분명해진다. 경제 재건을 비핵화와 맞물려놓았지만 비핵화를 등 떠밀리듯 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비핵화를 위한 논의와 진전이 더딜수록 북한도 그만큼 다급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현지지도를 통해 경제 재건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속내도 그만큼 복잡할 것이다.

이제는 북한이 과거와 같이 비핵화를 제스처나 정치적 공방으로 비껴갈 수는 없다. 즉, 갈림길에 서 있다. 그동안 걸어온 길, 그리고 걷지 않은 길 사이에 북한은 서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이 어디로 나아갈지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북한 스스로 ‘비핵화’와 ‘번영’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때, 북한이 나아갈 길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기 영 노 황 재 준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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