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제주평화연구원에서 제23차 남북관계 전문가 토론회가 개최됐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하고 북한연구학회, 제주평화연구원, 한국평화연구학회, 현대북한연구회가 공동 주관하고 JIBS 제주방송이 후원한 이번 토론회는 ‘새로운 한반도 평화·협력의 시대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를 대주제로 진행됐다.
현장에서는 권위 있는 학계 연구자와 소장학자, 시민사회 활동가를 비롯한 전문가 30여 명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시각에서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논의했다.
황인성 사무처장은 개회사에서 “판문점 선언으로 한반도에 역사적인 대전환이 일어난 지금,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를 이루기 위해 남북관계 전문가 여러분의 지혜를 나누어달라”고 당부했다.
“강대국 정치 배제하면서도 관련국 이익 반영”
이날 토론회는 오후 1시 30분부터 5시간 동안 총 2회의 세션에서 4명의 발제자가 의견을 발표하고 이에 관한 토론과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토론 참여단 30여 명이 둥글게 둘러앉은 가운데 1세션에서는 이수석 한국평화연구학회장이 사회를, 2세션에선 김병로 북한연구학회장이 사회를 맡았다. ‘한반도 평화시대를 향한 대내외 협력 방안’을 1세션 주제로, ‘新남북협력시대의 바람직한 교류협력 추진 방향’을 2세션 주제로 두고 진행한 토론회는 모든 참석자의 발언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했다.
1세션에서는 신대진 성균관대 좋은 민주주의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 ‘한반도 평화체제와 국제 협력’을, 탁용달 한국자산관리공사 통일자산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이 ‘평화통일 플랫폼으로서의 민주평통의 역할’을 제목으로 각각 발제했다.
신대진 선임연구원은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 과정에서 강대국의 정치를 최소화하면서 관련국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조치”라면서도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사실상 ‘3자 협상’ 틀의 하위 채널로 이슈별로 워킹그룹(Working Group·실무회의를 진행하는 협의단)을 구성해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동아시아 철도공동체’를 언급한 것과 관련해 신 선임연구원은 “대통령이 주변 국가가 함께 추진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시함으로써 관련 국가와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개방성 높은 국가로 갈 것임을 일관되게 주장했는데, 특정 국가와의 경제 협력 가능성은 다른 국가와 이해관계 충돌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프로그램보다는 주변 관련 국가와 협력을 높이는 ‘개방성 국가’ 수준의 표명이 적당해 보인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1세션 토론자로 나선 김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동북아 다자 간 협력과 함께 추진할 때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박형준 선문대학교 외래교수는 “국내 정치적 요인들이 대외정책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미국의 중간선거, 중국의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미·중 간 무역전쟁으로 야기될 국내 정치 요인들을 고려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박호성 국제평화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북한의 변화와 관련해 우리는 통일시대를 위한 전쟁보다 분단시대의 평화가 낫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탈냉전시대의 도래가 인류의 평화와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보기 어렵지만, 우리 민족의 통일은 새로운 인류의 미래상 을 제시하는 창조적 대안이 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강대국 정치가 필연적이라는 의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송영훈 강원대 교수는 “미국과 중국 간 상호 의존성이 더욱 높아지는 반면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미국과 중국 중심의 강대국 정치의 필연성이 제기되곤 하는데, 과연 이 프레임이 21세기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적실한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여령 협동조합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중국은 북핵 문제보다 북한 문제를 중시하는 듯한데, 우리 정부는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발제한 탁용달 책임연구원은 자문위원의 자문건의 기능과 역할 강화, 국민의 통일 관련 다양한 여론 수렴, 정부의 통일정책 구상과 집행을 위한 환경 조성을 일명 민주평통의 ‘업의 본질’이라 명명했다. 탁 책임연구원은 “민주평통이 자문 기능을 강화하는 플랫폼으로서 재탄생하려면 자문위원 구성을 전문가위원회, 정치위원회, 시민위원회 등의 형태로 재편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가령 각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자문위원 관리 강화나 자문위원 활동 평가 옴부즈만 운영, 자문위원 상대로 한 폐쇄형 의견 수렴 애플리케이션 개발은 평화통일 플랫폼을 통한 민주평통의 업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양화하는 실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인성 사무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자문위원 평가 옴부즈만’·‘정책 모니터링제’
이에 대해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부대표는 민주평통 자문위원 선출 방식과 관련해 “절반 정도의 인원을 개방형 공모 방식을 통해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권오국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자문위원 정책건의 실명제 도입과 함께 “자문위원의 정책 공감도 순에 따른 정책 모니터링제를 실시·공표해 자문위원의 위상과 역할을 제고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근본적인 자문위원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문인철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자문위원의 역할이 자문인지, 통일운동인지, 현 정권의 대내적 통일정책 지지 기반을 확충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분권화시대 추세에 발맞춰 이창희 한반도평화포럼 연구위원은 “지방자치단체,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주민참여형 통일사업(통일문화제 등), 지역맞춤형 남북 교류협력 사업(지자체 남북 교류협력 조례 제정포함)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이현희 민주평통 사무처 전문위원은 사람, 행동, 정책을 포괄하는 평화통일 플랫폼의 역할을, 전소영 민주평통 사무처 전문위원은 청소년 중심으로 동질성 회복에 초점을 둔 지자체 남북 교류협력 방안을 각각 제시했다.
2세션에서는 황수환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선임연구원과 도종윤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이 발제자로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황 선임연구원은 “지체별로 진행된 인도적 지원, 경제, 사회문화, 체육, 관광 등 남북 교류협력 사업의 민관 전문가 활용 방안을 강구하자”면서 “자문위원이 당연직으로 참여하는 ‘민주평통 남북교류협력지원협의체(가칭)’를 구성해 지자체별 의견을 조율하고 취합한다면 자문위원의 역할과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토론자들은 남북 교류협력의 경험 사례를 발굴하자는 제안에 공감을 표했다. 남근우 사무처 정책연구위원은 “특히 중국과 일본은 남북 교류협력의 사례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므로 이들 지역협의회를 통해 동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은주 고려대 공공정책연구소 연구교수는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려면 중앙정부가 지자체로 하여금 독립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면서 “다만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느라 사업이 중복되거나 전시성, 일회성 사업으로 전락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전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자는 의견도나왔다.
이준희 제주대 강사는 “북한 지방공업(경공업, 농업, 식품가공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 뒤 장기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기술 이전이나 상품 기획, 상품 판매로 수익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평화교육의 전면적 시행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다. 초·중·고교는 평화·통일 교육의 전면 시행과 이를 위한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대학은 교양과정에 통일 관련 교과목 개설을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교육의 확대를 위해 ‘통일교육지원법’ 등에 관련 근거를 마련할 것도 제안했다.
최순미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연구교수는 “오랫동안 남북관계가 단절됐던 점을 감안할 때 남북이 직접 만나는 것보다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NGO)가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과거 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체육 분야에서 남북 교류가 많았던 것도 국제기구가 중재자로 나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남북 청소년 지역 교류사업을 제안했다. 함 교수는 동독, 서독 청소년이 주기적인 합숙과 토론을 통해 통일 의식을 제고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각 시도교육청, 학교, 시민단체 등과 협의해 남북 청소년이 지역 교류 차원에서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홍석훈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자체가 중심이 되는 로컬 거버넌스를 구축해 남북 교류사업의 신뢰성을 확보하자”면서 북핵 문제, 국제정세 변화와 관계없이 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중·장기적 ‘투트랙 정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1세션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국제협력’을 발표하고 있는 신대진 성균관대 좋은민주주의연구센터 선임연구원(위). ‘평화통일 플랫폼으로서의 민주평통의 역할’을 제목으로 발제하고 있는 탁용달 한국자산관리공사 통일자산연구센터 책임연구원.
평화의 섬 제주를 남북 평화의 상징으로
이번 토론회는 ‘평화의 섬’ 제주에서 열린 행사인 만큼 이와 관련된 발제가 발표됐다. 도종윤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제주도민 대표단 방북, 남북 민족통일 평화체육문화축전, 제주 각급 남북회담, 제주 흑돼지 남북 협력사업, 제주 마늘 지원사업 등 일련의 사업을 거론하면서 “제주의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 지역 특성을 반영한 감귤, 흑돼지 등 특산물 위주로 추진됐는데, 이 사업이 실제 농가 소득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동시에 대북 교류협력에도 공헌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제주도는 2005년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06년 특별자치도로 승격돼 남북 교류를 위한 제도적, 재정적 정당성 확보가 용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관련해 이상숙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연구교수는 “제주 지역이 가진 다양한 사적과 문화유적지를 활용해 제주의 역사를 평화의 역사로 만드는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이지순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제주도의 17대 평화 실천사업 중 ‘물교육’, ‘남북민족평화축전’, ‘모슬포전적지’ 등이 남북 교류에 적극 활용될 수 있다”며 “특히 모슬포 가미카제 훈련장이었던 알뜨르 비행장은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의 상징적인 공간인 동시에 남북 평화의 상징적인 공간으로도 확장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대진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연구교수는 “한반도 냉전 종식 선언과 평화체제 출발의 선언장으로 제주를 활용한다면 제주가 세계적인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며 “내륙지역이나 접경지역에서 남북 교류협력이 남북 양측에 부담 요소로 작용할 때에는 평화의 섬 제주에서부터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고 협력의 효과를 북상시켜나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승대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 연구원은 “전시성, 이벤트성 사업은 장기적으로 지양해야 하지만 어떤 사업이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북한과의 신뢰가 쌓인다”며 “이벤트가 있어야 더 좋은 이벤트를 발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한 연구원은 지방정부의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 대한 반성은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자칫 위계 관계를 통한 사업 축소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 게 이유다.
2세션에서 발제자로 참여한 황수환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 선임연구원(왼쪽). 발제하고 있는 도종윤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토론회는 김일한 동국대 연구교수의 정리로 마무리됐다. 토론회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황인성 사무처장은 “지금 민주평통은 새로운 남북관계의 전환점에서 민족의 번영과 평화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면서 “신진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이 자리가 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동력이며, 이에 ‘전문가 토론회’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민주평통은 차후에도 새로운 시각을 가진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관련 의견을 교환하고 논의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