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경계를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비무장지대(DMZ)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남북 경계에는 DMZ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남북한 사이 육상에는 DMZ가, 한강 하구에는 중립수역이 설정돼 있다. DMZ에서의 모든 통행이 제한을 받는 것과 달리, 정전협정은 한강 하구 수역에서 민용 선박의 항행을 허용하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DMZ에 대한 관할권은 군사정전위원회가 가지므로 이 지역은 헌법상 우리 국토의 일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제한되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는 지역이다. 이러한 제한성은 DMZ의 평화적 활용과 관련해 중요한 제한 요인이 되고 있다.
정전협정은 남북한 해상경계 설정에는 실패했는데, 그 결과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해상에서의 무력 충돌 방지를 위해 동해와 서해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했다. 특히 서해 NLL은 그 법적 지위를 놓고 남북한 간 갈등이 있었으며, 이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긴장이 수십 년간 이어지면서 DMZ를 포함한 남북한 접경지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이 밀집된 지역으로 변모했으며,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갈등과 단절의 공간이 됐다. 접경지역에 광범위하게 설정된 군사시설보호구역은 주민 생활의 불편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재산권 등 기본권 제한과 지역 발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DMZ는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연복원력에 의해 생태와 환경이 복구된 것이다.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사계(射界) 청소, 인간이 설치한 철책 등 장애물 때문에 왜곡된 생태계도 존재하지만 다양한 생태·환경적 가치가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DMZ의 평화적 활용과 관련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DMZ의 평화적 활용에 대한 구상은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제안돼왔다. 냉전 시기의 제안들은 DMZ의 실질적 비무장화에 초점을 맞췄는데, 1972년 유엔군 수석대표였던 로저스(Feliz H.Rogers) 소장의 제안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냉전 시기 DMZ 평화적 활용 구상은 정치적 제안의 성격이 강했으며, 어떤 구상도 실질적 진전을 보지 못했다.
비무장지대, 한강 하구 중립수역, 북방한계선.
DMZ 탄생과 남북 접경지역의 현실
탈냉전 시기에 들어 DMZ 평화적 활용에 대한 최초의 의미 있는 남북 합의는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였다. 당시 남북한은 DMZ의 평화적 이용에 합의했지만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합의사항을 실천한다’는 선언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에 그쳤다.
DMZ 평화적 활용에 대한 구상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남북 도로·철도 연결 사업이 DMZ 인근에서 추진되면서 DMZ의 평화적 활용에 대한 구상들도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접경지역에서 남북 협력사업이 추진되면서 접경지역 주민들의 인식도 변화했다.
2000년대 들어 접경지역 지자체인 강원도와 경기도는 각각 산림 병충해 방제사업과 말라리아 방역사업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 사업들은 남북 협력을 통해서만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며,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사업이기도 했다. 이 밖에 DMZ의 생태·환경적 가치가 주목받으면서 이와 관련된 구상도 다양하게 제시됐다. 정부 부처들은 경쟁적으로 접경지역 활용 구상을 내놓았고, 접경지역 지자체들 역시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이 모든 구상과 사업들은 현실화되지 못했거나,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여러 접경 지자체들까지 관심을 가져온 통일경제특구 사업은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지자체의 남북 협력사업은 제한적으로만 추진될 수 있었다. DMZ세계생태평화공원을 조성하려는 사업과 DMZ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신청하는 사업은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
DMZ 평화적 활용 구상과 판문점 선언
군사적 완충지대로 탄생한 DMZ의 특성상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긴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DMZ의 평화적 활용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판문점 선언과 최근의 한반도 정세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판문점 선언이 DMZ의 평화적 활용이나 DMZ 평화지대화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핵화가 이뤄지고,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DMZ를 포함한 남북한 접경지역에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DMZ 평화지대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지역의 평화지대화가 개별적, 독립적으로 추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치·군사적으로 가장 첨예한 DMZ의 특성상 이 지역의 변화는 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가 전제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접경지역과 관련해 판문점 선언은 동해선·경의선 철도와 도로의 연결, 군사적 적대행위 중지 및 평화지대화, 서해 NLL 일대 평화수역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개별 사업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2018년 한반도 정세의 변화 추세를 고려할 때, 판문점 선언이 현실화된다면 그 변화의 범위는 선언문상의 조항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18년 상반기에만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세 차례의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비핵화 실무협상이 시작되면서 다소 속도가 둔화됐지만, 최근 한반도 정세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한 중대한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한반도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할 것이며, DMZ를 포함한 접경지역 개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구조의 해체를 의미한다.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구조가 해체되고, 평화로운 협력질서가 수립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 도로·철도 연결은 단순히 남북한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륙과의 육상 연계를 의미하며, 우리 사고의 지평을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대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륙과 육상을 통한 교통·물류·에너지망이 연결되면 이 모든 인프라는 북한과 접경지역을 거쳐 남한 지역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이 크게 완화될 것이다. 물론 핵이 제거됐다고 해서 북한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핵을 포기한 북한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확대되고,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접경지역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동안 논의가 정체돼 있던 생태와 환경적 가치를 활용한 남북 협력사업과 경제 협력사업은 물론이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들이 이뤄질 것이다.
6월 22일 경기 포천시 포천아트밸리 조각공원에 설치된 공병 작가의 ‘민족의 염원’ 앞에서 한 부부가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한반도 지도 조각은 6·25전쟁 이후 포천시 곳곳에 설치된 대전차 방호벽의 일부 콘크리트 구조물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DMZ 평화지대화를 위한 과제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DMZ를 포함한 접경지역에서의 남북 협력사업은 정치·군사적 근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근본 문제에서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아직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우선은 접경지역의 현안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말라리아, 조류 인플루엔자, 구제역, 산림 병충해 등 초국경 질병에 대한 남북 공동 대처뿐 아니라, 한강과 임진강 등 남북 공동수계에서의 재해·재난 방지 및 갈수기 수량 배분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남북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는 북한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남측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북제재를 고려할 때 추진 명분이 분명한 사업에 먼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통일경제특구를 비롯한 본격적인 경제 협력사업들은 비핵화의 진전에 따른 경제제재 해소와 연동해 추진이 가능한 사업이다. 다만 비핵화 문제가 과거보다 빠르게 진전을 보일 경우에 대비해 좀 더 철저한 계획과 남북 간 협의가 필요하다. 과거 상당히 많은 사업들이 북측이라는 상대방에 대한 고려 없이 추진돼 최종 단계에서 무산된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접경지역에서의 협력은 남북한 모두의 이해와 수요를 고려해 사전에 상호 협의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화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군사적 긴장이 해소돼 남북 간 경제·문화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경우에 대한 준비가 그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접경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국토 활용 및 대륙과의 육상 연계에 대한 종합적 비전과 관련된 것이다. 국경이 존재하되 인지할 수 없는 유럽 국가들처럼 남북한이 대립과 갈등 없이 지내는 세상 말이다.
말라리아, 조류 인플루엔자,구제역,산림 병충해 등 초국경 질병에 대한 남북의 공동 대처를 비롯해 한강, 임진강 등 남북 공동 수계에서의 재해·재난 방지 및 갈수기 수량 배분 등 접경지역의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