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북한 사람들 스스로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며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 역시 확실히 보였다”고 말했다. 무원 스님은 “국가적으로는 종교를 매개로 한 민간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텄다는 데 영통사 복원사업의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이끈 무원 스님

“한반도 평화통일,
종교에 답이 있습니다”

15년 전 경의선 육로를 통해 46만 장의 한국산 기와가 북한으로 건너갔다. 사상 최초 민간 방북이자 종교를 매개로 한 민간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가 트인 순간이다. 무원 스님은 “이렇게 많은 이가 북한을 직접 방문하고, 사람과 사람이 접촉해 서로를 알아나가는 것만큼 통일을 앞당기는 길은 없다”고 강조한다.

1998년 정주영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역사적 이벤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2003년부터 2004년 사이 경의선 육로를 통해 46만 장의 한국산 기와가 북한으로 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기와뿐이랴. 건축 자재와 의류, 생필품 등 다양한 물품이 이 길을 통해 열여섯 차례 북한에 지원됐다. 개성공단이 가동하기도 전, 경의선 육로를 통해 이뤄진 사상 최초의 민간 방북이었다. 바로 대한불교천태종이 진행한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과정이 남긴 귀중한 기록이다.

당시 영통사 복원 불사 단장을 맡았던 이는 무원 스님(현 대전 광수사 주지). 약 4년에 걸쳐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며 불사를 총지휘하고, 그 과정에서 북측 담당자와 ‘호형호제’할 정도의 신뢰를 쌓으며 국내에서 손꼽을 만한 ‘북한통’이 됐다. 스님을 대전 광수사에서 만나 우선 영통사 복원사업의 의의부터 물었다.

“우리 종단으로서는 천태종의 시조인 대각국사 의천이 활동하고 입적했던 성지를 복원한다는 의미가 있고, 국가적으로는 종교를 매개로 한 민간 교류를 통해 통일의 물꼬를 텄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지요. 영통사 복원작업을 위해 300여 명의 인원이 북한을 방문했고, 복원이 완료된 이후에는 개성 일대 천태종 성지순례에 1만 명의 불자가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가 북한을 직접 방문하고, 사람과 사람이 접촉을 해서 서로를 알아나가는 것만큼 통일을 앞당기는 길은 없지요.”

영통사 복원의 계기는 우연히 시작됐다. 1995년과 1996년 북한을 휩쓴 대홍수가 그것이다. 그때 땅이 깎이고 쓸리면서 17세기 이후 자취를 잃었던 영통사의 흔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총련계 동포인 최준 씨가 천태종에 영통사 복원 지원을 제안했고, 천태종은 이를 수용했다.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경제협력위원회와 함께 ‘영통사 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복원 작업에 돌입했다.

북측과 복원사업을 위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북측은 불사에 필요한 현물 지원 외에 현금 지원을 요청했고, 육로와 해상 운송을 병행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현금 지원은 불사 외의 목적으로 전용될 소지가 있고, 해상 운송을 할 경우 배에 기와를 선적했다가 내리는 과정에서 기와가 깨질 위험이 있었죠. 우리가 현물 지원, 육로 운송 원칙을 강력히 주장한 끝에 결국 이 원칙을 관철했습니다. 한 번에 차로 갈 수 있는 육로를 놓아두고 왜 굳이 배로 운송을 한단 말입니까. 당연히 우리 땅을 밟고 가야지요!”

막상 육로 운송을 결정하고도 어려움이 이어졌다. 당시 경의선 육로는 상태가 엉망이었다. 첫 지원 방문 때기와 10만 장을 실은 18톤 트럭 24대가 개성으로 출발했는데, 비포장 흙길에 개울을 건너야 하는 등 ‘산 넘고 물 건너는’ 험난한 노정이었다. 결국 3차 지원 때는 차량이 전복돼 5000장의 기와가 깨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후 천태종이 경의선 육로 포장을 적극 추진하게 된 계기다.

현물 지원, 육로 운송 원칙 관철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북측의 ‘말 바꾸기’ 같은 일도 일어났었나요.
“애초 지원할 물품은 현장까지 지원단이 동행해 전달하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애써 싣고 간 기와를 개성공단에 부려놓고 돌아가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와 배달하러 여기까지 온 것인가, 북한 대중들 만나려고 오는 거지. 기와만 부려놓고 가라고 하면 그냥 갖고 돌아가겠다’고 버텼죠.

‘그럼 그 기와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북측 인사가 묻기에 ‘어차피 한국에는 기와 필요한 절 많다. 갖고 돌아가서 우리 절 짓는 데 쓰면 된다’고 받아치면서요. 사업의 손익을 따지는 기업체가 아니라 종단이 진행한 사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뱃심 있게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우리 뜻대로 불사 현장까지 기와를 싣고 갈 수 있었죠.”

어려움은 북측과의 신경전뿐이 아니었다. 종단 차원에서 결의한 사업이요, 철저히 법적 절차를 밟아 진행한 일임에도 스님은 종교계 보수적인 인사들로부터 ‘종북’, ‘빨갱이’ 소리도 적잖이 들었다고 한다.

정부도 협조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굴착기, 불도저 등의 중장비 지원에 난색을 표하며 제재하려고 했다. 불사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불사가 끝까지 마무리되려면 중장비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종단의 설득에 결국 지원을 허용했다고 한다. 결국 이렇게 북에 지원된 중장비는 개성까지 육로를 포장하는 데 쓰이며 이후 성지순례나 개성 관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영통사 복원사업은 2005년 10월 31일 만 2년 만에 마무리됐다. 1997년 유적지 표적 조사를 한 후로 8년에 걸친 역사(役事)였다. 7만여 평 대지에 건물 29개 동, 건평 1800평 규모였다. 완공에 즈음해 2004년 11월에 열린 최초의 남북 공동 대각국사 열반대재를 비롯해 공동 낙성법회 및 학술토론회, 칠월칠석 법회, 남북 공동 천도재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2007년에는 남쪽 불자들의 개성 성지순례가 시작되고, 이는 현대아산이 개성관광 사업을 펼쳐가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이 의장은 “아무리 좋은 합의를 내놓는다 해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바로 폐기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회 비준이라는 법적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울지 않는 아이에게 누가 젖을 줍니까. 아이가 울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키듯, 우리도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세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기성세대 중심 남북 교류, 청소년으로 확장돼야

하지만 이 같은 종교 및 문화 교류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과 2009년 서해교전 등을 거치며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전면 중단된다. 남북 경제협력 사업도 멈춰 선다. 개성공단이 폐쇄돼 개성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힌다.

애써 일궈낸 남북 교류사업인데, 아쉬움이 크셨겠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죠. 한번 열렸던 문이 닫히면 다시 열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정부가 그렇게 쉽게 문을 닫아버리다니…. 하지만 이 같은 남북 긴장 국면에도 북측이 2009년 대각국사 908주기 열반다례재와 2015년 영통사 복원 10주년 기념법회 때 천태종 스님을 북으로 초청했으니 교류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변화할 것은 변화하게 마련이므로, 지금 당장 어려움이 있다 해도 다만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자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종교계 남북 교류도 재개될 것으로 점쳐집니다. 스님은 어떤 전망을 갖고 통일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개인적으로는 현재 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부산·경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아 시민단체와 함께 남북 교류사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행되는 대부분의 남북 교류가 기성세대 사이의 그것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남북한 청소년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북한 불자 청소년 연합캠프, 북한 사찰 템플 스테이 등의 방안도 생각해보고 있고요.”

무원 스님은 남북 교류나 통일 외에도 다문화 운동과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송환, 타 종교와의 소통과 공동 사업 등의 다양한 사회적 화두에도 천착해왔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경찰청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통일부 장관 표창을 수상하고 2017년에 국가보훈공헌대상 종교지도자 부문 대상 및 대한민국 사회공헌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의장은 “아무리 좋은 합의를 내놓는다 해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바로 폐기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회 비준이라는 법적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4년 11월 16일 북한 개성 영통사를 방문한 남측 천태종 대표자들이 북측 개성 영통사복원위원회 측에 건축 마감재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에서 다섯번째 남성이 무원스님이다.

주변국 협조 유도하는 게 민주평통 역할

북한을 50여 차례나 방문해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자로서 대북 통일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조언해줄 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대북사업은 서둘지 말고 해야 합니다. 서두르면 실수가 생깁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서서히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야 하죠. 대북 사업을 하는 사람들 중 마음이 너무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칫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앞서서 의제를 선정하지 말고 북쪽 파트너가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파악하고 일을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특히 북한 실무자들은 대남 사업의 성과가 바로 자신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사업 마인드’를 갖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스님은 또한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우호적 관계와 협조가 필수적이라며 “세계를 향해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우리 모두가 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지 않는 아이에게 누가 젖을 줍니까. 아이가 울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키듯, 우리도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세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이 비핵화하도록 우리도 나서겠다. 그러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도와달라’ 라고 큰 소리로 요청해서 결국 남북 정상회담을 이뤄낸 것은 큰 성과입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오래 일한 바 있는 무원 스님은 그래서 더욱 힘주어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에게 “목소리를 더욱 높이자”고 당부한다.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우리의 요구와 요청을 알리는 것이 곧 국운을 키우는 것입니다. 통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 여부를 떠나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평통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해줄 적임자입니다. 비핵화를 하자고, 평화를 만들자고 우리 함께 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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