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수 공주시 향토연구가
충남 공주시청 앞길인 40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km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우금치(牛禁峙), 우금고개다. 우금치는 예로부터 공주에서 남부 지방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의 하나였다. 그리고 공주는 한양과 전라도 지방을 연결해주는 결절지역(結節地域·여러 가지 기능이 집중되는 접촉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우금치는 예전에 도적이 많아 해가 저문 뒤에는 소를 끌고 고개를 넘는 것을 막았다 할 정도로 외진 곳이기도 하다. 이 외진 고개 일대가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동학농민군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있는 곳 중 하나인 우금치 전적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전횡에 반발하면서 발생한 동학 농민봉기는 전주화약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가 심화되자 이에 분개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내겠다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바로 동학 2차 봉기다. 이들은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을 시도했다. 1894년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농민군과 관군의 첫 접전은 농민군이 삼례에서 출동한 지 20여 일 만인 1894년 10월 23일 일어났다. 10월 24, 25일 효포·능치 싸움에서 경천으로 후퇴하기는 했으나 농민군의 기세는 여전히 거세게 공주를 압박하고 있었다. 부대를 이인과 판치에 배치한 농민군은 11월 8일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공주 감영에는 일본군이 급파돼 우금치 방어에 주력했다. 다음 날인 11월 9일 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인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다.
| 죽창 vs 스나이더 소총
공주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산줄기가 삼태기 모양으로 시가를 감싸고 있다.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천연적인 요새지로 알려져왔다. 남쪽에 주미산(381m), 동남쪽에 월성산(313m), 서남쪽에 두리봉(272m)의 높은 봉우리가 있고, 그 사이에 능치, 우금치 등의 고개가 있다. 그중에 우금치가 가장 낮고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와의 교통 연결이 좋다. 이런 이유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연합군은 공주가 동학군에게 점령되면 그들의 전진기지가 될뿐더러 한양까지는 일사천리로 닿는 곳이어서 공주 함락을 막기 위해 우금치에 최후의 방어선을 폈다.
한편 동학군은 우금치 공격을 위장하기 위해 별도로 네 갈래의 보조 공격로로 나눠 공격했다. 첫째는 효포에서 능치를 넘는 길이었고, 둘째는 이인의 검상마을에서 주봉의 새재를 통해 일락산을 넘어 가는 길이며, 셋째는 곰나루 쪽으로 돌아 웅진동을 거쳐 금성여고 앞을 지나 하고개를 넘거나 바로 봉황산 뒤편으로 감영을 치는 공격로이고, 마지막으로 주미산에서 우금치와 능치 사이의 금학동으로 빠지는 골짜기를 통해 공격하는 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인 쪽에서 우금치를 향해 조일연합군을 밀어붙이고, 연합군은 고갯마루와 서쪽 견준산에서 방어했다. 동학농민군은 병력 1만여 명에 죽창, 창, 칼, 농기구 등이 주무기였고 얼마 되지 않는 화승총이 전부였다. 조일연합군은 3000여 명에 최신 스나이더 소총을 비롯해 게틀링 기관총과 크룹포로 중무장했다.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타들어가는 것을 기다려야 하고 사거리가 100보인 데 비해 스나이더 소총은 자발식이며 사거리가 500보나 됐다.
순창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몰아붙였으나 조일연합군의 우세한 무기 앞에 고갯마루 150m 앞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고개를 덮고 피가 계곡을 붉게 물들였다. 1만여 명의 농민군은 4일간의 두 차례 접전에서 50여 회의 공방전을 펼친 끝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만 전주 방면으로 후퇴했다.
우금치 전투에 대해 녹두장군 전봉준도 “1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 자는 3000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2차로 접전한 후 점고하니 500여 명을 넘지 않았다”며 치열한 싸움이었음을 회상했다. 당시 일본군은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니 이는 전투라기보다 차라리 학살이라는 말이 옳을 듯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우금치 전투 후 순창에서 12월에 체포돼 1895년 3월에 처형됐다. 이로써 1년 동안 전개됐던 동학농민전쟁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 우금치 마루에 흐르는 소리 없는 통곡
우금치는 충청감영을 목전에 두고, 고개도 넘어보지도 못한 채 무참하게 짓밟힌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소리 없는 통곡으로 절절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날 쓰러져간 농민군의 소리 없는 통곡과 한이 서려 있는 고갯마루 북쪽, 공주가 바라보이는 그곳에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천도교에서 1973년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세웠다.
농민군이 쓰러져간 곳은 고개 남쪽인데 위령탑은 왜 고개 북쪽에 세웠을까. 이는 농민군 그 누구도 넘지 못하고 쓰러져간 그들의 원혼이나마 자유롭게 넘나들며 공주를 내려다보도록 배려한 것이라 한다. 우금치 전적지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이 되는 1994년에 사적 제387호로 지정됐다.
송장배미에 설치된 동학농민군 모자의 동상.
1980년대에 문승현이 작사·작곡한 ‘이 산하에’라는 노래가 대학가에서 많이 불렸다. 노래 첫소절이 ‘기나긴 밤이었거든 / 압제의 밤이었거든 /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우금치는 압제에 항거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이 농민들이 중심이 된 개혁운동으로 외세를 몰아내려는 민족운동이었으며, 그 최후의 격전지가 우금치였기 때문이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치며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곳으로,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역사상 매우 뜻깊은 터전이다. 우리나라 주변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살펴볼 때, 동학 정신은 오늘날 더욱 필요하며 앞으로도 계속 가꿔나갈 우리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우금치 전적지에는 쇠락해가는 동학혁명위령탑만이 외로이 서 있다. 동학전쟁 최대의 격전지라는데 조형물도 없고, 어디 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위령탑 주변에 몇 개의 조형물만 있을 뿐이다. 어떠한 선양사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우금치 영산재를 지낼 뿐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오늘의 우금치 전적지를 돌아보며 과연 무엇이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길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 송장배미와 하고개
공주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아픔과 흔적이 곳곳에 배어들어 있지만, 우금치 전적지 외에 한 곳을 더 살핀다면 송장배미를 들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은 우금치를 곧바로 공격하는 한편, 한산소와 박산소를 지나 송장배미에 집결해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하고개는 마치 병목과 같은 요새지였다. 농민군은 밀물처럼 진격해갔으나 수많은 시체를 뒤로하고 후퇴해야 했다. 저기 눈앞에 보이는 고개만 넘어가면 감영에 이르게 되는데, 그들은 목표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쓰러져갔다.
수많은 동학군의 시신을 논 한쪽에 매장했는데 시체를 매장한 논이라 하여 송장배미라 불려왔다. 지금은 연못으로 조성돼 그때의 참상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연못 앞에는 동학농민군 모자의 동상이 서 있다. 손에 든 죽창 하나로 관군과 싸우다 전사한 아들과 죽은 아들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어머니 모습의 조각상을 통해 그 당시의 참상을 느낄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혼령을 위로하는 우금치 영산재가 몇 년 전부터 열리고 있다.
지금은 그들의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는 사람도 없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이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는데 아직도 원혼은 허공을 떠돌고 있으니 그 외로운 혼을 누가 달래줘야 하는가.
우금치 전적지처럼 아픈 비극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스스로 반성하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이라 한다. 공주에는 우금치처럼 아픈 현장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황새바위이다. 이곳은 천주교 4대 박해 시기에 수많은 신자들이 공개 처형된 사형 터로 천주교 주요 성지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