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옥 섬 ‘군함도’. 일본 나가사키현 앞바다에 자리한 이 작은 섬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일제의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간 징용 피해자들이 광복 이후 72년이 지나는 동안 거의 대부분 세상을 떠난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 늦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뒤늦게나마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모든 이들이 군함도만이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열도 전체가 지옥 섬 군함도와 같은 강제동원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이 근처에서 물을 달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꽤 있었어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저희 집에 물을 떠놓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꽃이라도 바치고 싶지만 주위 시선이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일본 오키나와현 모토부정(町)에 살고 있는 주민 나카무라 히데오(88) 씨가 70여 년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이며 꺼냈다. 일본 최남단 휴양지 오키나와. 지난 6월 나는 화려한 휴양지의 뒷면에 감춰진 슬픈 역사를 만나기 위해 또 하나의 지옥 섬 오키나와를 찾았다.
1945년 1월 22일, 이곳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송선 히코야마마루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됐다. 희생자들의 시체가 바다로 떠올랐고, 군인들이 시체를 육지로 옮겨 통나무를 쌓아 화장했다. 나카무라 히데오 씨를 비롯한 마을 소년들은 화장을 하는 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밤새 시체들이 유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화장이 끝나자 소년들은 구덩이를 파서 희생자들을 묻었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오키나와로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도 있었다.
지난 6월 19일 오키나와 지역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한 장의 사진을 특종으로 보도했다. 1945년 5월 28일 발행된 미국 잡지 ‘LIFE’지가 이곳에서 ‘미군의 공습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묘표 14개가 세워진 사진을 보도했는데 류큐신보가 이를 확인한 것이다.
류큐신보는 강제동원된 조선인 사망자 명부를 모은 <전시조선인강제노동조사자료집(다케우치 야스토 편저)>에서 묘표에 이름이 남겨진 사람들 가운데 金山萬斗, 明村長模, 半田充祇 등 조선인 희생자 세 명의 이름을 확인했다. 한편 오랫동안 오키나와전(戰) 희생자들의 유해를 직접 발굴해온 구시켄 다카마쓰 씨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지역주민들과 공동 작업으로 유해 발굴을 진행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일제 강제징용의 상징이 된 일본 나가사키현 앞바다에 있는 섬. 군함 모양이어서 군함도라 불린다.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에 한국 유족들의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찾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장완익 공동대표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대일 과거사 문제를 맡고 있는 나는 희생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에 술을 뿌리며 두 손을 모았다. 이희자 대표는 술을 따르며 나지막하게 되뇌었다.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에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전격 방문으로 두 나라 사이에 역사·영토 문제가 불거졌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건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2월 28일 굴욕적인 위안부 문제 합의라는 ‘외교 참사’를 저질렀다. ‘합의’가 나온 이후 양국 간의 대화는 실질적으로 중단됐으며, 교육칙어의 부활을 비롯해 평화헌법 개정까지 시도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화 행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시베리아 억류자, B·C급 전범, 근로정신대, 야스쿠니 문제, 강제동원 및 강제노동 등 대일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고 있다. 피해자들의 뜻을 철저하게 무시한 한국 정부의 ‘외교 참사’가 불러온 재앙이 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 외교 흥정 대상 아닌 인도적 문제
2016년 4월 일본 정부는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을 제정해 전사자 유골 수집 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유골을 수집해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정했다. 이에 따라 유골의 DNA를 추출해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고 유족들에게는 DNA 정보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그 대상을 ‘우리나라(일본)의 전몰자’로 규정해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돼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들은 배제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와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의회의 유족들은 법안이 논의되던 초기 단계인 2014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총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에 한국인 전사자 유골에 대한 대책을 수립할 것과 유골 조사 사업에 한국의 유족들도 참여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유류품이 한국인 전사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유골이 있을 경우에는 수용하지 않고 한국 정부와 협의한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되풀이했다. 이는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골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일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며, 실제로 이 사업에 한국인 유족들의 참여를 배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유족들과 일본 시민단체는 일본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이 문제의 해결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뜻을 같이하는 일본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일본 정부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그 결과 2016년 2월 18일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노동성 대신으로부터 한국 정부가 구체적으로 제안을 해올 경우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핵될 때까지 일본 정부에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2017년도 예산에 유족들의 DNA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비용 3억 원을 신청했지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관련 비용이 전액 삭감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70여 년 전 강제로 끌려간 가족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겠다는 유족들의 절절한 염원에 반드시 답해야 한다. 유족들의 고령화를 고려해 희망하는 모든 한국인 유족들의 DNA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가 수집하고 있는 유골과 대조해 희생자 한 분의 유골이라도 유족들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이는 외교적인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일본 정부도 해결을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
한편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와 우리 사회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가야만 한다.
첫째, 2015년 12월 31일에 종료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수집·조사한 강제동원 피해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해 한일 시민사회가 추진하고 있는 진상 규명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 규명과 배상 등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한 이른바 ‘2+2(일본 정부+일본 기업+한국 정부+한국 기업 출연)’ 재단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재단의 설립에 대해서는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변호사연맹이 공동으로 제안한 바가 있다. 이를 위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인권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해 현재 운영 중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법적 지위를 높이고 실질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지원, 기념 사업 등 후속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강제동원 피해자의 추가 진상 조사와 유골 조사, 반환 사업을 위해 한일 정부 간 교섭을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부 간 교섭을 통해 유골 조사를 비롯해 피해자의 우편통장 반환과 후생연금 정보의 제공 등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넷째, 대일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내외 시민사회 및 국제사회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북한, 중국 등 침략전쟁의 피해를 본 아시아 각국 정부 및 시민사회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계속해서 압박해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문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제 등에 걸쳐 국제적 연대를 더욱 강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실패한 지난 정부처럼 과거사 문제를 더 이상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올바른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두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보편적 인권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외교 참사’는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