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촛불혁명으로 국민 주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1945년 8·15 광복이 잃었던 국권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국가 주권의 회복’이었다면, 촛불혁명에 의해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 주권의 회복’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진정한 광복은 통일로 완수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 속에 소모적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북정책의 방향을 경축사에서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북한의 연이은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 정세가 반영돼 한반도 평화 정착과 분단 극복에 초점이 모아졌다. 경축사에 나타난 대북정책은 ①한반도 평화와 분단 극복을 위한 우리의 주도적 역할 ②생존전략과 시대적 소명으로서의 평화 정착 ③한미동맹에 기초한 안보위기 타개 ④전쟁 반대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⑤제재와 대화의 병행 ⑥북한 붕괴 불원, 흡수통일 불추진, 인위적 통일 불추진 등 3불(3不, 3No) 천명 ⑦‘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실현 ⑧이산가족 문제와 인도적 협력 등 쉬운 문제 우선 해결 등이다.
| 베를린 구상의 재확인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대북정책 관련 내용의 대부분은 지난 7월 6일 베를린에서 밝힌 ‘신한반도 평화 비전(베를린 구상)’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구체화한 것이다. 북한이 7월 28일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북·미 갈등이 격화되면서 베를린 구상이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겠다”는 베를린 구상을 재확인했다.
한반도 평화 구상과 대북정책의 방향을 담은 ‘베를린 구상’은 김대중 정부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구상과 노무현 정부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노력을 계승해 대한민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이끌기 위한 베를린 구상은 ①북한 붕괴, 흡수통일,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 오직 평화 추구 ②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③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④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실현 ⑤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해 비정치적 교류협력 사업의 일관성 있는 추진 등이다.
이러한 한반도 평화 구상에 따라 정부는 한반도 평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먼저 쉬운 일인 ①이산가족 상봉 논의를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 ②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호응 ③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 상호 중단 ④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을 위한 남북 간 접촉과 대화 재개 등을 북한에 제안하고, “올바른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 국면을 전환시킬 계기가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베를린 구상에 호응하지 않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베를린 구상을 다시 환기하고 우리의 대북 제안에 북한이 적극 호응해나올 것을 거듭 촉구했다.
베를린 구상과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 키워드는 ‘오직 평화’와 ‘전쟁 반대’다. 베를린 선언에서 오직 평화를 강조하며 평화우선주의를 표방한 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에 따른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을 반영한 것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에서 핵과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을 계승해 상호 존중,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공존공영을 추구할 것을 선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 7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통해 북핵 공조 및 대응 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 ‘오직 평화’와 ‘전쟁 반대’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를 한반도의 시대적 소명과 우리의 생존전략으로 규정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대장정을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어 전쟁 반대를 천명하고 “한반도에서의 군사 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 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정보당국(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 DIA)으로부터 북한의 핵무기 소형화 성공을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8월 8일 ‘화염과 분노’라는 말을 하고, 8월 9일 “바라건대 핵무기를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8월 11일 “대북 군사옵션이 준비돼 장전됐다”면서 “김정은이 다른 길을 찾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동원한 군사적 수단의 사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맞서 북한은 8월 9일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의 선제 타격 기도가 드러나는 즉시 서울을 포함한 괴뢰 1·3 야전군 지역의 모든 대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남반부 전 종심에 대한 동시 타격과 함께 태평양 작전 전구(戰區)의 미제 침략군 발진기지들을 제압하는 전면적인 타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8월 12일 북한 전략군이 “8월 중순까지 괌 포위사격 방안을 최종 완성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 가능성
이처럼 광복절 경축사를 준비하는 시기에 북·미 간에 군사적 충돌도 불사할 듯한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인식 아래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정은이 8월 14일 전략군사령부를 찾아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고 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8월 16일 “북한 김정은이 매우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고 하면서 정세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미국 국무부가 8월 16일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실험, 역내를 불안정하게 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성실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그것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위기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가 다소 진정돼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사에서 “평화를 지키는(Peace keeping) 안보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Peace making) 안보로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 번영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이는 소극적 안보 개념을 뛰어넘어 적극적 안보 개념을 도입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안보 우려를 근원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 반대라는 소극적 평화 개념을 넘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적극적 평화 개념을 실현하려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적어도 북한이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단해야 대화의 여건이 갖춰질 수 있다”고 했고, 미국 국무부도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과 도발적 언행을 중단하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의 실패를 인정하고 ‘전략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대화의 문턱을 낮춘 것은 한반도 위기 정세 완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미국은 대화의 조건으로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행동을 요구해왔다.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이 중단된 것도 북한이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재와 압박 속에서도 북한이 핵·미사일 고도화에 매진해 이제는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어 미국도 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 같다.
북한이 빠른 속도로 핵·미사일 완성을 추진하고 있어 남북관계 복원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북한이 남측 진보 정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고, 그들의 전략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하면서 그에 맞는 남북관계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어 당분간 남북관계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남측이 쉬운 문제 우선해결론을 펴면서 남북 군사당국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의한 데 비해 북한은 정치·군사적 근본문제 우선해결론을 펴면서 한미 합동 군사연습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8월 위기설’이 현실화하지 않고, 북한이 핵실험과 ICBM 발사 등 추가 도발을 하지 않을 경우 대화 국면으로 정세가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제재 국면에서 대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지만 북핵 해결에 도움이 되는 대화, 군사분계선에서의 남북 사이의 우발적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대화는 서두를수록 좋을 것이다.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북한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