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 정상회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10·4 공동선언’ 10년 “한반도 평화 정착 위한 로드맵
현 상황 고려해 계승·발전 필요”

2007년 10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0·4 공동선언의 내용을 되짚어보고, 현재의 시점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지 10년이 흘렀다. 당시 남북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분야별 과제를 총정리한 ‘10·4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그러나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후임 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10·4 공동선언을 계승하지 않았고, 남북관계 경색과 북핵 위기가 이어지면서 환경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10·4 공동선언의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 10년간 교착 상태에 놓였던 남북관계로 말미암아 불신이 깊고 국제 환경의 악화로 남북 간 합의를 실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남북관계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10·4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남북관계에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을 망라했고, 남북한이 합의 가능한 실천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달라진 국제 환경과 남북관계 환경 변화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10·4 공동선언은 남북관계 정상화를 생각한다면 우회하기 어려운 이정표다.

| 2007년 정상회담 성사의 교훈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 배경엔 공통점이 있다. 북핵 위기 상황에서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동시에 진전시킬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적절한 시기는 바로 남·북·미 삼각관계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시기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유지되고, 한미 양국 사이에 대북정책에 관한 협력이 이뤄졌던 순간이기도 하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북정책에 관한 한미 양국의 협력을 중시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겠다”고 했고, 나아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해 3자가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북한에 대한 정권 교체(Regime Change),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 등의 발언으로 대표되는 초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 인식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변화된 계기는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의 패배,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움직임에 따른 비확산 체제의 위기도 작용했지만, 한국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설득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2007년 1월 부시 행정부는 베를린에서 북한과 양자협상을 하고, 2월 13일 베이징에서 북핵 문제에 관한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된 과정은 현재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10·4 공동선언은 다양한 분야의 구체적인 합의를 포함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관한 합의다. 노무현 정부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의 남북 군사 충돌도 겪지 않았다. 군사대화는 2000년까지는 한 차례도 없었지만,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 2007년 12월까지 44회 개최됐다. 노무현 정부 들어 군사 분야 남북대화가 총 28회 있었는데, 2007년에만 11회의 군사회담이 열렸다.

10·4 공동선언은 남북 군사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열렸고,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요한 과제를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1차 회의에서 “남과 북이 주도해서 평화체제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공표하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을 출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조선전쟁에 관련 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분계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10·4 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 과정에서의 남북 당사자 주도 원칙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잠정적 과정으로서의 ‘한반도 종전 선언’을 합의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은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는 의미지만, ‘종전선언’은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다. 휴전 관리체제와 종전 관리체제는 다르다. 한반도 정세의 악화로 종전선언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지만, 종전선언의 방안과 후속체제에 대한 논의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0·4 공동선언 이후 북핵 문제는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됐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 프로세스’가 실종됐다. 달라진 상황을 고려해서 다시 실현 가능한 ‘외교적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법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역할에 대해서는 2005년 9·19 공동선언에서 처음으로 합의했고, 2007년 10·4 공동선언을 통해 진전시켰으며,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 2일 경기 파주시 문산읍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다.

| 평화와 공동 번영의 선순환

북핵 해법에 관한 중국 측의 ‘쌍궤 전략’, 즉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두 바퀴를 동시에 가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게 아니다. 10·4 공동선언의 한반도 평화 정착에 관한 합의를 중요한 근거로 삼을 필요가 있고, 현재적인 상황 변화를 고려해 좀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10·4 공동선언은 당시의 남북관계에서 분야별로 협력할 수 있는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했다. 그중에서 서해 평화협력지대 구상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상경계선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경제 협력을 통해 서해에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평화 정착과 경제 협력의 선순환을 제시한 것이다.

10·4 공동선언으로 서해는 분쟁의 바다에서 평화와 공동 번영의 바다로 변화할 수 있었다. 서해 평화 정착은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 구축의 입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관계 악화로 서해 평화협력 구상은 이행되지 못하고 서해는 다시 냉전의 바다로 돌아갔다. 서해에서 군사적 충돌이 재발했고, 육상에서도 군사 대결 시대의 풍경으로 되돌아갔다.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평화경제 지대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평화 정착 과정에서 법·제도적인 차원의 평화협정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실상의 평화’ 즉 군사적 신뢰 구축이 훨씬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베를린 연설을 통해 남북관계를 재개하는 입구에서 ‘군사회담’을 북한에 제안했다. 앞으로 남북 군사회담이 열린다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선 긴장 고조의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일 수 있지만, 10·4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 군사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풀어가야 할 것이다.

10·4 공동선언은 평화를 기반으로 한 남북 공동 번영의 가능성에 뜻을 같이했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기존 남북 경제 협력의 발전뿐만 아니라 경의선 연결을 포함하는 남북 교통 협력, 동해와 서해에서의 조선 분야 협력을 포함하는 호혜적인 산업 협력 방안을 합의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관계 악화와 북핵 위기, 그리고 제재 때문에 남북 경제 협력의 환경은 악화됐다. 경제 협력에는 국제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고 달라진 경제 상황을 반영한 실천 전략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구상하고 있다. 저성장 기조에 접어들고 있는 한국 경제는 잠재성장률을 확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 공간의 확장과 동시에 새로운 경제 기회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10·4 공동선언의 합의는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주요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단 한 번의 군사 충돌도 겪지 않았다. 2007년 11월 29일 평양 송전각에서 열린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오찬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왼쪽)과 북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건배하고 있다.

| 남북 합의의 지속성과 국민 합의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인도적 현안의 해결도 중요하다. 상봉을 기다리는 이산 1세대들이 대부분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시간’은 제한돼 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이산가족들의 한을 해소할 수 있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나아가 10·4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다양한 영역의 사회문화 교류도 활성화돼야 한다.

10·4 공동선언 10주년을 맞으며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남북 합의의 단절성이다. 과거 서독의 보수정당인 기민당이 집권했을 때 헬무트 콜 총리는 진보적인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사민당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를 대동독 정책의 멘토로 삼았다. 그래서 독일의 경우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통일의 길을 열고,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통일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외정책은 국내 정치와 달라서 지속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대외정책의 지속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초당적 협력을 중시한다.

우리도 정치문화를 한 단계 발전시켜야 할 때가 왔다.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이념 논쟁으로 무능과 부패를 감추던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10·4 공동선언 이후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과거 냉전시기로 돌아갔고, 북핵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됐다.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켜 공동 번영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북핵 문제도, 한반도 평화 정착도 해결의 과정이 필요하다. 장기간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전략의 지속성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관성적인 이념적 접근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실사구시’적 접근을 한다면 조금씩 합의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10주년을 맞은 10·4 공동선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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