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가 교착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평통은 문재인 정부가 향후 추구해야 할 한반도 평화통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북한·통일 문제 전문가 좌담회를 가졌다. 8월 25일 서울 중구 장충동 민주평통 회의실에서 ‘남북관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는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김영윤 (사)남북물류포럼 회장, 김진향 재단법인 여시재 선임연구위원,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가나다순)이 참석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평가,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전제조건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는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이 맡았다.
사회자 |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7·6 베를린 선언, 8·15 경축사 등을 통해 북한에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한다면.
김영윤 | 문재인 정부 들어 대북정책이 남북관계를 북한 핵 문제와 연계하는 ‘연계론’에서 핵 문제와 관계없이 동시에 추진하는 ‘병행론’으로 전환됐다. 특히 문 대통령은 평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국민과 국제사회에 보여줬다.
차두현 |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핵심 키워드는 ‘평화’와 ‘공동 번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고, 흡수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제재’와 ‘대화’를 병행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와 대의는 분명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지만, 그동안 북한의 행태를 종합해볼 때 최소한 단기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실현될 여건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김진향 | 평화에 대한 의지는 높아 보이지만 남북관계 상황 인식에 다소 한계를 보이고 있다. 새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에 ‘핵·미사일 포기’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대화는 없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지난 10년간 실질적인 대화가 없는 상황이었다. 국방, 외교 등 산적한 현안을 풀어야 하는데 스스로 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상황인 셈이다. 대화의 틀이 마련되지 않으면 앞으로 남북관계는 악순환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 北 ‘인센티브’ 없이 대화 응하지 않을 것
사회자 | 문재인 정부의 대화 제의에 북한이 응하지 않는 이유는.
김진향 | 앞에서 말했듯,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대화를 제의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선 마치 우리가 그들이 먹지 못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에 오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차두현 | 우리의 전제를 재평가해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북한을 흡수통일하지 않는다’고 밝히면 북한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흡수통일 불가론을 밝혔지만 북한은 핵·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했다. 더구나 북한은 이제 핵·미사일 개발을 통해 자신들이 남북관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경우 취할 수 있는 접근은 두 가지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든지, 북한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는 추가양보를 하든지. 개인적으로는 전자(前者)를 제언하고 싶다.
김근식 | 남북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대화 국면’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조금 제재를 가해도 대화를 병행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관계가 ‘제재 국면’이다. 과거와 달리 북한이 남한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남한으로부터 얻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없다면 대화에 응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사회자 | 북한이 원하는 것이 뭘까.
차두현 | 북한이 바라는 것은 핵·미사일 개발이고, 남한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돼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북핵은 분명 우리에게 현실적 위협이다. 우리 스스로를 위협에 노출시키면서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김진향 | 그동안 분단 역사에서 남북 최고지도자급의 역사적인 4대 합의인 7·4 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적 정신을 꼽으라면 바로 상호 존중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평화와 상호 존중을 강조했다. 남북관계는 철저히 상호 존중의 관점에서 논의돼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한 휴전 상황, 광의적 의미의 전쟁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제재와 압박은 북에게 대립과 갈등만 심화시킨다. 평화의 기조를 포기하지 않아야 제재도 실효성이 있다. 지난 10년간 어떤 대화도 없이 제재와 압박만 해온 상황에서 또 제재를 언급하는 것은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문제가 될 수 있다.
김영윤 | 북한은 오래전부터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아왔다. 어떤 나라든지 제재를 받으면 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나름대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미사일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왜 북한이 핵·미사일을 개발하려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차두현 | 일부는 맞는 이야기다. 물론 우리가 북한의 행동을 ‘도발’로 보지 않고 그 어떤 상황이라도 대화하려 한다면 북한도 ‘진정성’을 느껴 대화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진정성’인가? 또 그러한 접근이 국내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결국 북한이 우리의 의제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레버리지(지렛대) 문제다.
사회자 | 북·미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할까.
김근식 | 8·15 경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은 대한민국 허락 없이 안 된다’며 평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이 발언이 자칫 한미동맹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북한이 괌으로 미사일을 쏘겠다는 데는 아무 발언이 없다가, 미국이 북한에 포격하겠다고 하자 ‘한반도에서 전쟁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 건 미국으로선 섭섭할 수 있다. ‘전쟁 반대’, ‘평화 사수’가 한미 간의 신뢰를 해치고 동맹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 북핵 프레임에서 평화 프레임으로
김진향 | 문 대통령은 ‘우리가 운전자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운전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남과 북이 자주 만나 대화를 해야 한다. 남북이 만나야 미국도 중국도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즉 평화적 남북관계를 중심축으로 외교와 국방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운전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김근식 | 대북 제재보다 대북 핫라인을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과의 대화가 오랫동안 단절된 탓에 요즘엔 남한이 휴전선 확성기에 대고 북측에 대화하자고 해야 할 정도다. 이런 방식이라면 우리로선 북측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이디어를 낸다면, 당분간 비핵화를 선반 위에 올려두면 어떨까. 지금처럼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면 북한은 그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북측에 비핵화를 선반 위에 올려놓겠다는 메시지를 주고, 국제사회의 제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그 점은 양해를 구하면 될 것이다.
사회자 | 남북관계 경색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개성공단이다. 특히 개성공단이 대북 제재의 한 수단이 되어버려 재가동을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김진향 | 개성공단은 남북관계를 풀어가기 위한 상징적인 존재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개성공단 재가동을 활용해볼 수 있다. 안보리 제재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중요한 것은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확고한 의지다.
차두현 |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으로서는 남한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망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으니 무조건적인 조기 대화에는 신중해야 한다. 다만, 북핵 위협에 대한 대응능력을 높이면서 대화 요건의 문턱을 다소 낮추는 접근은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도 대미·대주변국 외교력이 필요한 거다.
김근식 |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와 남한과 대화하고, 그것이 비핵화에 상당히 기여한다면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
| ‘북맹(北盲)’ 극복이 출발점
김영윤 | 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기제로 금강산 관광을 제안한다. 현재 북한은 하나의 국가로서 유엔에 가입돼 있다. 북한이 개인이 관광하지 못할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다. 개성공단 재가동과 달리 금강산 관광은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금강산 관광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
김진향 | 이제 ‘북핵 프레임’에서 벗어나 ‘평화의 프레임’으로 넘어와야 한다. 북핵 프레임에서 보면 이런 상황에서 남북 경협이나 개성공단 재가동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평화의 프레임에서 보면 지금이 전쟁의 위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남북이 만나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국제사회에 던진다면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회자 | 대북정책이나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민주평통의 역할을 조언한다면.
차두현 | 민주평통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의장인 대통령에게 통일 및 대북정책에 관해 자문건의를 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게 다양한 집단의 의견을 취합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민주평통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를 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역대 정부가 대국민 소통과 통합 작업에는 소홀한 면을 보여왔다. 이 작업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해낸다면 훗날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김영윤 | 민주평통 역할은 대통령에게 통일과 대북정책에 관해 자문건의를 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미래 통일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평통이 국민에게 통일의 청사진과 확신을 심어줬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진향 | 남북관계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풀어가야 하는 사안이다.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위해선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북한에 대한 정보나 인식이 매우 왜곡돼 있다. 제18기 민주평통의 활동 전략이 ‘국민 속으로, 국민과 더불어, 국민과 하나 되어’다.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이 왕성하게 활동해 이번 기회에 ‘북맹(北盲)’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