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 외교도 단절적이지 않으며, 시간과 과정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전 정권의 정치·외교적 유산은 차기 정권에 필연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문재인 정부의 대일정책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5년 12월 28일 갑작스레 박근혜 정부가 한일 양국의 외교장관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한 위안부 합의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위안부 강제연행과 전시 성폭력은 사춘기 어린 소녀조차 끌고 간 끔찍한 비극이었다. 보편적인 여성 인권을 철저히 유린하고 여성을 치욕적인 성노예(Sex Slavery)로 삼은 일본의 행위는 극단적인 식민 지배의 참상 그 자체였다. 적게는 3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에 이르는 위안부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동원됐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민간업자의 소행으로 치부하거나 일본군의 직접적인 관여를 부인해왔다.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고백하기까지 일본 정부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극력 부인했다. 1992년 고노 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서 일본군 개입과 사죄, 반성을 표명했음에도 아베 총리와 일본회의 소속 우파정치인들은 위안부 강제연행과 난징 대학살을 부인해왔다.
올 2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일본 내각부로 동남아 지역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범죄에 대한 자료와 재판 기록을 송부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인지한 정도에 그치고 있다. 기록 자체가 진실인지 아닌지, 사죄와 반성을 느끼는지, 강제연행인지 여부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지 않다. 아베 정권에 진정성 있는 위안부 문제의 사죄와 반성을 기대한 것은 애당초 그릇된 판단이었다.
| 잘못된 졸속 합의, 일본 역사 반성에 면죄부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한일관계에서 역사와 영토를 중시했다. 2013년 3·1절 담화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천 년이 지나도 바뀔 수 없다”고 천명하고,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고 일본 정부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중국해와 북한 핵문제로 미·중 갈등이 증폭되고, 사드 배치와 위안부 논쟁이 불거지면서 한국 외교는 점차 위기를 맞게 됐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은 2015년은 중대한 기로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한·중·일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11월 2일 첫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한일 위안부 협상은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분위기에서 급속히 추진됐다. 결국 12월 28일 한일 양국의 외교장관이 서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협상 타결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 사업에 10억 엔을 지급하며 ▲이번 합의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하고 ▲양국은 국제사회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을 자제한다는 것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25년간 활동해온 지원단체가 배제된 채 전쟁범죄 인정, 사죄와 반성, 용서와 화해, 보상과 치유라는 진정한 해결 과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정부의 속내는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으며, 법적 책임을 질 수 없고,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보상은 종료됐으며, 10억 엔을 지급하면 한국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처리하고,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에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졸속 합의에 피해자와 시민단체, 여론과 국민들은 반발했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의 역사 반성에 면죄부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소녀상 이전을 둘러싼 이면 합의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본 외교의 승리이며, 일본이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는 평가마저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후보가 위안부 합의 재협상 내지 파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후 아베 총리와의 전화회담에서, 7월 7일 독일 함부르크 정상회담에서, 대다수 한국 국민이 12·28 합의를 수용하기 어렵고 따라서 지혜를 발휘해 위안부 피해자와 국민들이 수용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7월 10일 나눔의집을 찾아 피해자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위안부TF 설치와 합의 재검토
12·28 합의는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결여된 것이었다. 정부에 공식 등록된 위안부 239명 가운데 37명이 생존해 있고, 이미 사망한 수만 명의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일본 정부가 피해자를 직접 찾아 용서를 구해야 맞는 것이었다. 가해자의 용서와 피해자의 수용, 대화와 공감을 형성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해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피해 당사자와 시민단체가 한일 합의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전시 성폭력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범죄를 인정하고, 기록하고, 교육시키고, 보상함으로써 재발 방지를 해야 한다는 것은 2007년 미 하원 결의안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무슨 이유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에 동의했는가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다음 세대에 전후 반성의 부담을 떠넘기지 않겠다는 아베 총리의 역사 왜곡에 편승했다는 비난마저 나왔다. 합의 이후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나 위안부 관련 연구는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내내 수차례나 발생한 일본 정부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 속 시원한 대처와 비판을 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이래 우리 정부는 위안부 피해에 위로금 형식의 일본 자금은 받지 않겠다는 도덕적 우위를 꾸준히 지켜왔다. 그런데 12·28 합의는 10억 엔의 헐값에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것으로 비쳤다. 심지어 지난해 4월 아베 총리의 최측근 하기우다 관방장관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과 10억 엔 위로금은 패키지라고 강변했다. 피해자와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응축된 소녀상이 정부 간 합의 대상이 된 것에 많은 국민들은 반발을 느꼈다. 소녀상 이전을 둘러싼 이면 합의 의혹도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다.
7월 31일, 외교부 장관 직속으로 위안부 피해자 합의 재검토 태스크포스(이하, 위안부TF)가 설치됐다. 졸속 합의에 대해 국민 70% 이상이 반대하고 있으며, 소녀상 이전도 78%가 반대하고 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의 문제점, 10억 엔 수령으로 도덕적 우위 상실, 소녀상 이전과 이면 합의 의혹 등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위안부TF는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 서서 사실 파악과 진상 규명, 12·28 합의를 평가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위안부TF는 외교부와 청와대 내 관련 외교문서와 주요 기록의 분석, 국내 관계자와 관련 기관 인터뷰, 피해자와 시민단체에 대한 방문 청취 등을 압축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수사권도 없는 위안부TF가 연말까지라는 촉박한 일정 내에 얼마나 완벽하게 진상을 밝힐 수 있을지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한일 합의에 대한 국민의 비판과 의혹이 높은 만큼 최대한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잘못 내려진 정부 결정에 대한 조사와 평가가 성역 없이 정확하게 이뤄지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위안부TF 설치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한일 간의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방침을 천명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약속 등 국제사회의 원칙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자세를 기대했다.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를 본 아시아 각국에 100년 이상 사죄와 반성을 거듭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좀 더 확실하게 일본군 관여와 강제연행 사실 인정, 정부의 법적 책임 수용, 지속적인 반성과 사죄를 이행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개인 보상, 미래세대 교육을 반드시 실시해야 할 것이다.
| 위안부 문제, 해법은 있는가
전시 범죄와 역사적 진실은 결코 왜곡되거나 잊힐 수 없다. 잘못을 반성하고 이를 교훈 삼아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 교류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거나 좌시하지 않겠지만 양국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인식도 가지고 있다.
내년 10월이면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을 맞는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인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약속한, 양국 관계의 이상적인 모델을 보여주었다. 대일 문화 개방과 국민 교류 급증, 정치·경제·안보 협력의 추진,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등 양국 정부와 국민 간 호감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북핵과 미사일 위기로 한반도 분쟁 가능성마저 나오고 있는 요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파트너십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위안부TF 보고서가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외교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년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20주년에 한일 양국의 정상이 더 한층 성숙하고 진정성 넘치는 우호와 협력의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를 기대한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