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문재인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7월 7일 독일 함부르크 G20 정상회의에서 한·러 정상회담을 가졌다.

러시아의 신동방정책과 한·러관계 남·북·러 3각협력 지렛대로 활용해야

러시아는 9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하는 등 ‘신동방정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동방정책이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관계 개선의 기대감이 함께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24일 대통령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송영길 의원은 특사로는 처음으로 푸틴 대통령을 만나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남 · 북 · 러 협력 등에 관해 좋은 분위기에서 환담을 나눴다. 이어 7월 7일에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가진 첫 한 · 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극동 개발에 한국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양국 간 호혜적인 협력을 발전시켜나가기로 합의했다. 또한 9월에 열리는 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달라는 푸틴 대통령의 초청에도 화답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와 ‘신북방정책’의 연계를 공약으로 제시한 문재인 정부는 한 · 러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드 설치로 한중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북핵 위기 해결에 러시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도 문재인 정부에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푸틴 3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신동방정책의 성과가 미흡한 상황에서 한국과의 경제 협력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고 싶은 바람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북핵 위기로 고조된 동북아 갈등을 안정시키고, 북핵 때문에 강화된 미국의 역내 군사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뿐 아니라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다.

| 푸틴의 ‘신동방정책’

러시아의 ‘아시아 중시정책’이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유라시아 국가라는 역사적 정체성 속에서 꾸준히 추진해왔다. 한국을 동방정책의 대상으로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198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진 고르바초프의 ‘신태평양 시대’ 선언이었고, 이는 양국 수교로 이어졌다.

‘동방벡터(Vostochnyi Vektor)’라고 불린 동방정책이 공식화된 것은 ‘2008년 신외교 개념’이었다. 이 문서는 러시아 외교에서 아시아 · 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과의 협력 메커니즘에 참여할 것임을 표방했다. 동방벡터를 내세우게 된 것은 2000년대 추진했던 현대화 정책이 사실상 실패하고, 유럽 자원시장에서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제약과 시장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동방벡터의 기본 가정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의 자원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잠재적 투자자이며, 러시아는 이들 나라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대체해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 회복에 주력해야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 경제 무대에서 협상력이 미약했고, 중국과의 에너지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사실상 ‘중국 피봇(Pivot to China)’이었던 동방벡터의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동방벡터가 우리가 신동방정책이라고 부르는 ‘동방 중시(Povorot na Vostok)’로 전환하게 된 것은 푸틴 대통령 3기 임기가 시작된 2012년쯤이다. 2012년과 2013년 대통령 교서에서 잇따라 러시아 극동의 중요성과 선도개발지대 및 극동개발기금 조성을 표명했고, 2012 APEC 정상회담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치했다.

러시아의 동방 중시 정책은 동방벡터와 비교해 첫째, 지정학적 성격이 강화됐다. 동방벡터 시기 러시아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어려워진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 활성화에 치중했다. 그러나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과의 관계가 냉전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동방 중시 정책은 선택이 아닌 불가피한 필연이 됐다.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서방의 노력에 대응해 동아시아에서 피난처(특히 중국)를 찾는 방어적 노력과 함께, 북한 정권 지지를 통한 레버리지 확대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필수요소라는 인식하에 동북아의 지정학적 문제에 더욱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둘째, 유라시아 경제 통합이 신동방정책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요소로 등장했다. 2015년 출범한 ‘유라시아 경제연합’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접합을 모색하면서, 푸틴 대통령은 20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에서 이란, 파키스탄, 인도와 아세안을 유라시아 통합에 참여시키는 ‘대유라시아 파트너십(Greater Eurasia Partnership)’을 추진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대해 극동 개발 투자의 리스크를 줄이면서 다른 지역 시장과의 상호 보완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러시아는 극동 개발과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신동방정책을 펴고 있다.

러시아 자유무역항 및 선도개발지역

따라서 우리가 신동방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을 단순히 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며, 경제적 이익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지정학적 이익이 크다면 과감히 추진해나가는 게 필요하다. 러시아 극동은 한반도의 유라시아 경제 통합 참여의 입구이며, 유라시아 경제 통합에 참여하는 다양한 입구 마련이 필요해졌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은 남북한 등거리 원칙, 한반도 비핵화 지위 지지, 6자회담 등 정치적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정당한 참여 보장, 역내 경제 협력 제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1990년대 남한 경도적 인식이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감소를 가져왔다는 것을 학습한 후 북한이 러시아의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입지에 중요한 자산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신동방정책으로 우선 과제가 된 러시아 극동 개발이 북한의 참여 없이는 실제로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을 학습한 결과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미 · 러관계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는 러시아의 냉전적 시각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정치적 대화에 의한 북핵 해결을 강조하면서 북한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소극적이고, 북한과의 경제 협력은 강화해나가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 러시아의 한반도 전략

전통적으로 한국의 진보 정부에 더 우호적이었던 러시아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 남북대화 추진과 함께 미국 주도의 북한 압박에서 가급적 거리를 두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아세안 국가들에서 러시아가 중국과 독립적으로 외교적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동남아 국가들로부터 협력의 신뢰성을 증대시켰듯이, 북한에 대한 레버리지 증대가 중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러시아의 입장에 대한 중국의 존중을 얻어내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동북아 정세를 볼 때 문재인 정부 대외정책에서 러시아 변수의 관리가 매우 중요해졌다. 첫째,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대중관계의 악화는 대미 군사 의존 심화와 한국 경제의 대중 의존 심화라는 모순적 상황이 우리에게 매우 큰 부담임을 재인식시켰다. 한국의 동북아 외교의 전략적 입지를 확대하고 대중관계의 안전판을 갖기 위해 러시아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트럼프 정부가 중국 압박을 통한 북핵 해결을 추진하면서 일정 수준 북·중관계 악화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보이고 있는 기회주의적 행동은 북핵 해결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는 한미동맹과 북 · 중동맹의 강화를 불가피하게 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는 한·러관계 발전과 상충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양국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실현할 기제와 공유 이익을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 부응하는 경제 협력 우선 원칙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대북 제재로 당장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 · 북 · 러 협력 프로젝트를 대북정책과 연계해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의 시급성과 국제 공조의 필요성에 비춰 최초의 북한과의 대화는 북핵 문제에 한정해서 해야 하겠지만, 대화의 진전에 따라 매우 적극적인 남 · 북 · 러 협력사업 재개를 고려해야 한다. 북핵 대화 이전에도 남 · 북 · 러 협력이 가능한 사업을 극동지역에서 시작하되 향후 북한의 참여 가능성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7월 3일 러시아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 한·러관계 지경학으로 풀어야

그간 남 · 북 · 러 3각협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정밀한 타당성 연구에 기초한 정부 안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간 논의된 사업들은 장기적 비전은 있으나 그 구체적 추진에는 단계적이고 치밀한 집행계획이 필요했다. 예컨대 나진 · 하산 프로젝트는 경제적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자유무역협정(FTA) 역외가공센터 및 다방향 물류 허브 구축이 연계된 좀 더 포괄적 안이 마련돼야 한다. 또한 남 · 북 · 러 가스관 연결 사업의 경우 중국 및 일본과의 공동 협의가 필요하며, 시점을 서두르지 말고 셰일가스 수입 확대와 연계해 현실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합의한 유라시아 경제연합과의 FTA 추진은 사실상 효과가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해 시간을 갖고 산업 협력과 투자 보장을 충분히 포함하는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체결 추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을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불안정 요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지난해 미 의회조사국(CRS)은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이 성공한다면 대러 제재 효과를 저해하고, 미국의 동맹인 한 · 일과 미국 사이의 불신을 야기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러시아 극동에 미국 기업과의 공동 진출 가능성을 탐색하고, 일본과 대러 경제 협력을 공동으로 협의하는 한 · 일 · 러 소다자협력 추진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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