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에는 수 백리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고개를 넘고도 깊은 계곡을 따라 한참을 더 다리품을 팔아야 닿을 수 있었던 곳, ‘(길이 멀어) 울면서 찾아와 (떠나기 아쉬워) 울면서 떠난다’는 고장은 더 없이 고왔다. 그런 까닭에, 발그레 뺨을 붉힌 사과 알이 깊은 밤 알알이 불을 밝힌 전구 알처럼 반짝이는 시골길을 정처 없이 달리다 길을 잃었다. 낯선 길 위 제 갈 길을 찾기 못한다는 막막함도 잠시 옷자락이 스친 자리마다 붉은 여운을 남긴 계절의 잔상에 시선이 멈춘다.
멀리 덩치 큰 기암괴석 주변으로 물든 단풍이 유난히 수줍게 물들은 곳이 바로 주왕산국립공원이다. 태백산맥의 지맥으로 이루어져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설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불리는 곳. 더불어 가을 단풍이 곱기로 유명하다. 속이 깊은 산이라면 으레 그렇듯 닳아진 문살의 문양으로 그 나이를 가늠케 되는 사찰 하나를 입구에 두고 산자락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폭포와 계곡이 번갈아 방문객을 맞이한다. 다행히 주왕산은 암산치고는 등산로가 평탄하며, 산행자의 선택에 따라 걸어볼 만한 산책로도 제법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다.
돌다리를 건너 중국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협곡사이를 지난다. 물이 맑아 제 속을 감추지 못한 용추폭포 앞에 잠시 머무르다, 다시 자연이 조각한 또 다른 협곡을 지나 용연폭포, 절구폭포와 마주한다.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에 몇 번이고 발걸음이 멈추고, 감탄사가 터진다. 새하얀 학이 나와 부리를 손질하고, 흰 수염이 긴 신선이 나와 헛기침을 해도 놀랍지 않을 법한 풍경. 그중에서도 절곡계곡 주변은 길이 험한 대신 손이 덜 탄 자연경관을 만날 수 있어 추천한다.
서쪽을 제외한 대지의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은 이웃집에 마실 한번을 나갈 손치더라도 고개 한 두 개쯤은 거뜬히 넘어야 한다. 오죽하면 이름까지 청송인 고장. 그리 산이 깊으니 솟아오른 물 역시 깨끗한 것이 당연하며, 물이 고여 이룬 풍경 역시 장관이다. 비록 그것이 사람 손을 탄 장소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너른 들녘 곡식의 낱알을 살찌우기 위해 농수로 축조된 300년 된 저수지는 그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축조된 이례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내 부지런한 백성의 속을 태우지 않았다. 사실 자리를 만들어 물을 채운 몫만이 사람 손을 탔을 뿐, 품어 키워낸 것은 산이었다. 그러니 굵은 가지를 물가에 드리운 왕버들나무 사이로 느릿한 물안개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새벽녘의 황홀한 풍취에 본래 저수지임을 잊는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애써 떠오르지 않는 형용사를 내뱉기보다 그저 고요히 머무르기를 권한다. 이유 없는 조급함에 쫓기듯 달렸던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은 사이 가슴에 맑은 물기가 어린다.
청량한 물은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맛도 달고, 탁월한 효능도 가지고 있다. 톡 쏘는 맛이 빈말로도 ‘맛이 좋다’할 수는 없지만 몸에 좋다 하니 달기약수 한 대접 들이키는 것도 청송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한 자리에 오래 뿌리 내리고, 그 생을 이어 온 태곳적 생명력이 넘치는 고장의 시간은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겨우 제 발 끝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밟힐 무렵에야 그제야 시간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조선 영조시절 만석꾼이 쌓아올린 ㅁ자형태의 저택을 거닐 때는 거침없던 가을 햇살마저 점잖을 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흔 아홉 칸 고택, 높은 쪽빛 기와지붕 아래 윤이 반들반들 나는 툇마루에 앉아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고 있자니 게으른 졸음이 쏟아진다. 다행히 품이 넉넉한 고택은 낯선 길손에게도 구들장을 품은 제 집 아랫목을 내어준다. 더욱이 긴 오수로 인해 밤잠을 설치게 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문살 위 곱게 발라진 창호지를 섬세히 더듬는 달빛과 별빛을 구경하다보면 긴 가을밤도 한 순간이다.
길거나 혹은 짧게만 느껴졌던 밤을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지금은 비워진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지만 분주한 하루의 일과 속 금세 버거울만치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로 인해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겁내지 않아도 된다. 넘치게 채워진 것들은 다시 비워내면 된다.
<글.권혜리 / 사진.신영민 / 사진제공.청송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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