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산책

거제도와 평화의 연결고리 거제도와 평화의 연결고리

최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를 주제로 특별전시가 열렸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1950∼1955년까지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시된 자료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유엔과 국제적십자사에서 포로 관련 문서, 사진, 영상을 수집해 재구성한 것이다. 국내에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은 우리가 남북한 평화시대로 이행하는 데 어떤 역사적 의미를 던져 줄 것인가? 또 우리는 거제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거제와 평화의 연결 고리가 단지 포로수용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주 어느 날 새벽 6시 40분.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에서 거제시 고현행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나며 ‘거제’와 ‘평화’의 고리가 무엇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무성영화처럼 과거와 현재의 거제도가 어떤 곳인지 되짚어보고자 했다.

섬과 바다가 닿게

거제도는 제주도보다 면적은 작지만 섬 둘레(제주도 253km, 거제도 443km)만큼은 더 길다. 이곳은 울퉁불퉁한 해안과 높지 않은 산, 깊은 계곡을 가진 천혜의 땅이다. 섬은 서쪽에서 통영과 고성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부산과 일본 쓰시마와 연결되며 남쪽으로 내달리면 망망대해와 드넓은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1970년대부터 남부면의 해금강과 바람의 언덕, 일운면에 속한 외도와 내도 및 구조라 해수욕장, 동부면 학동 몽돌 해안 등은 매년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평화롭고 한가히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길 수 있는 안한자적(安閑自適)의 공간이다. 버스가 통영을 지나 신거제대교에 이르면 왼쪽의 한려수도와 오른쪽의 거제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1.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앞에 서면 당시 국군과 포로들이 만든 수용소 관리 건물들을 볼 수 있다. 1.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앞에 서면 당시 국군과 포로들이 만든 수용소 관리 건물들을 볼 수 있다.

2. 전쟁의 고통을 담고있는 전쟁 기록물 2. 전쟁의 고통을 담고있는 전쟁 기록물

3. 전쟁의 고통을 담고있는 전쟁 기록물 3. 전쟁의 고통을 담고있는 전쟁 기록물

1971년 통영과 거제가 처음으로 육지와 이어져 육로 교통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 때부터 유배지였다는 고도(孤島) 거제도는 고려 의종뿐만 아니라 송시열 같은 유명한 정치인과 학자들이 다녀갔던 변경(邊境)이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먼 바다 제주도나 류큐(琉球, 오키나와), 대만 해역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바닷길에서만큼은 변경이나 변방이 아닌 대항해 시대의 중심지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원래 섬사람들은 순박하고 호연지기를 가졌으나 점차 외세의 풍랑에 휩쓸려 안으로 휘어진 보호 본능에서 ‘꼭닥스러움’이 생겨난 것이다.

경계에 서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가 4시간 20분 만에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여러 차례 매립된 바다이며, 거제포로수용소의 부두와 보급창과 가까운 곳이다. 고현에서 약 10분 정도 동쪽으로 가면 장승포라는 갯마을에 이른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된 곳이다. 전쟁 발발 이후 1950년 12월 24일, 흥남 부두에서 떠난 메러디스빅토리호는 장승포 외항에 정박하고 피난민 1만 4500명을 하선시켰다. 장진호 전투 이후 고립된 미 해병대와 국군을 철수시키는 흥남철수 작전은 12월 9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만들어진 신화’다. 이 작전에서 철수한 군인은 10만 5000명이고 동원된 선박은 114척, 철수한 차량은 1만 7780대, 대량 화물 350만 톤에 이른다.

특히 흥남 부두에 모여든 인원은 약 20만여 명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피난민 9만 8100명은 미군 상륙주정(LST)과 상선 등에 옮겨 타고 부산과 거제도에 도착했다. 이미 거제도에는 1950년 10월 9일 3만 8000명의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피난민 수용소가 개설되어 있었다. 12월 17일 흥남에서 처음 도착한 선박이 4000명의 피난민을 장승포에 내려놓고, 24일 메러디스빅토리호가 도착했다. 1951년 1월 거제도에 거주하는 피난민은 12만 명이었다. 장승포항에서 내린 피난민들은 거제 전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같은 해 1월부터 고현과 수월 등지에 부산 거제리에서 옮겨 온 포로들이 포로수용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5월 본격적으로 유엔군 제1거제도포로수용소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에 포로 전체 인원 16만 8434명 중 거제도에만 13만여 명이 수용됐다. 이때 거제도 거주 인원은 주민 10만 명, 피난민 12만 명, 포로 13만 명, 포로 관리 인원 8만 명 등 총 43만 명이다. 현재 거제시 인구는 약 23만 명으로, 1951년 10월과 비교해 20만 명이 더 적다.

‘만들어진’ 또 하나의 ‘신화’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앞에 서면 당시 국군과 포로들이 만든 수용소 관리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지금의 고형중학교 뒤편에 늘어선 건물은 거제포로수용소 제15구역 포로 부속건물과 수용동이다. 포로수용소는 포로, 경비병, 관리병 외에도 수용소 사령부에서 일손을 돕는 민간요원 등으로 구성되고 철조망과 감시탑, 포로들의 생활공간 수용동, 화장실이나 목욕탕, 취사실, 약 제조실 등 다양한 부속건물까지 포함하고 있다. 1949년 발효된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들은 일정한 노역, 운동, 포로 조직(기존 군 조직)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포로의 구성원은 북한인민군이 다수이고 그 다음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8대 2 비율이었다. 북한인민군 포로 중에는 북한 점령 때 강제 차출된 ‘남한 출신’ 의용군과 지리산 등지에서 포획된 빨치산도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에는 과거 국민당군 장교나 사병 외에도 조선족 출신도 포함되었다. 거대한 수용소에는 일본 관동군 출신 포로와 미군 소속 구 일본군 포로도 소수 있었고, 그 외 북한 피난민과 러시아 모녀 등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했다.

유엔군과 북한은 개전 초기, 제네바협약을 준수한다고 선언했다. 이 협약은 전쟁이 끝나면 모든 포로들을 ‘자동송환’하는 송환 원칙을 담고 있다. 그러나 첫 정전 회담을 앞두고 제네바협약의 균열이 오고 있었다. 미군에서 포로들의 정치 심리전을 위해 ‘자원송환’을 내세운 것이다. 이는 내외부의 강압이나 강제 또는 강요에서 벗어나 포로 스스로가 송환될 나라를 선택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제네바협약과 정면으로 배치되었고 국제적십자사에서 반발했다.

4.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청동 조형물에는 6·25 참전 16개국의 지도와 국기가 표시돼 있다. 4.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청동 조형물에는 6·25 참전 16개국의 지도와 국기가 표시돼 있다.

거제도, 평화가 움트고 있는가

우여곡절 속에서 1953년 4월과 8월에 쌍방은 포로들을 교환하고, 1954년 1월 ‘자원송환’ 원칙에 따라 대만을 선택한 포로들과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을 처리했다. 북한에 수용된 국군 및 유엔군 포로들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편 거제도에는 미귀환 포로들과 흥남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생겨났다. 유엔군에 징발되어 포로수용소가 건설되자 정든 땅을 떠난 주민들도 생겼다. 이들은 ‘소개민(疏開民)’이라 불리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피난민과 함께 내려온 고아들이 모여든 고아원 (혹은 수용소)도 곳곳에 만들어졌다.

정전 66주년, 거제도는 평화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 평화가 그곳에서 움트고 있는가. ‘평화’라는 추상적인 명사이자 수식어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거제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노력에서 얻어지는 단어여야 한다. 평화를 위한 실천과 행동이 상처투성이 거제에서 가능하리라 본다.

전 갑 생 전 갑 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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