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아카이브

고난과 극복 반복하며
이어온 남북경협의 긴 여정

평화와 번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지난해 기적과 같이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 대전환의 서막을 열었다. 남과 북은 비로소 10년이나 지속된 ‘단절의 시간’을 멈추고, 이산가족상봉, 남북 철도 연결 착공, 체육·문화교류 등 다양한 교류협력을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

새해에도 한반도는 뜨겁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김정 은 위원장 답방 등 굵직한 행사들이 예고되면서, 금강 산 관광·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경협 이슈가 주목받고 있다. 남북경협이 제자리를 찾고 확대·발전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여는 일임을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기 우리는 남북경협을 통해 반세기 분단의 높은 벽을 허물었던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 중심에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현대의 남북경협 사업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가 앞장서 걸어 온 다사다난했던 남북경협의 여정을 기반으로 희망찬 평화와 번영의 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릴 것을 기대해 본다.

남북경협 추진의 역사

1989.1.31. 정주영 명예회장 ‘금강산개발 의정서’ 체결

1998.6.16. 소떼방북 장면

현대의 남북경협은 1989년 1월 역사적인 첫 포문을 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측 땅을 밟았고,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도전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엄혹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10년이 지난 후에야 그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그래도 없다면 새 길을 닦아 나가면 된다”는 신념으로 쉼없이 북녘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1998년 6월, 500마리의 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북녘 땅을 밟았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소떼방북’으로 남과 북은 민족 화해와 협력의 기치 아래 남북경협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1998.11.18. 금강호 첫 출항

남북경협의 첫발은 금강산 관광으로 뗐다. 1998년 11월 18일 882명의 관광객을 태운 금강호가 국민적 관심과 성원 속에 동해항을 출발했다. 때마침 서울에 있었던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감동을 금할 수 없다”며,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 발언이 전파를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한반도의 평화 이미지가 국제사회에 각인됐고, 국가신인도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금강산 관광은 거침없이 남북관계의 발전적 변화를 이끌었다.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기점으로 남과 북은 ‘화합과 협력’의 관계로 격상될 수 있었다. 이러한 평화 분위기 속에서 현대는 2000년 8월 북측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경제협력사업권’에 전격 합의하면서 남북경협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확대국면을 맞았다.

정몽헌 회장이 주도해서 취득한 ‘경제협력사업권’은 파격적이었다. 철도·통신·전력·통천비행장·금강산수자 원·명승지·임진강댐 등 북측의 대부분의 산업과 SOC 개발이 사업내용에 포함됐다. 이 사업권을 기반으로 현 대는 ‘개성공단’, ‘백두산 관광’, ‘개성 관광’ 등 중요한 사업들을 차근차근 실현시켜 나갈 수 있었고, 민족의 소중한 자산을 외국자본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하지만 머잖아 큰 시련과 역경이 닥쳐왔다. 2001년 3 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타계와 함께 현대그룹은 유동성 위기로 흔들렸다. 크루즈관광선을 운영했던 현대상선이 철수하면서 현대아산은 홀로 남북경협을 지키게 됐다. 여기에 관광사업 부진까지 겹치면서 금강산 관광은 최대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2003.2.14.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 2003.2.14.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현대는 다시 한 번 ‘새 길’을 열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의 활성화와 북측 관광사업의 대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당시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 차례에 걸쳐 어려운 북측과의 협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끝내 2001년 6월 △금강산 육로 관광 추진 △관광사업 대가 의 현실화 등 값진 합의를 이끌어 냈다.

남북경협 활성화와 도약의 중심에 서다

금강산 관광이 되살아나면서 남북경협은 ‘성장기’를 맞았다. 2003년 9월 육로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금강산 관광은 흑자사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같은 해 6월 개성공단을 착공하는 한편, 10월에는 평양 한복판에 현대가 건립한 ‘류경정주영체육관’을 개관, 1000여 명 남측 국민들이 경의선 육로를 통해 방북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를 가질 수 있었다.

2003.6.30. 개성공단 착공식 2003.6.30. 개성공단 착공식

현정은 회장 체제로 전환한 현대의 남북경협은 북핵 문제로 불거진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2004년에는 개성공단 시범단지 3만 평을 준공, 1단계 개발 100만평 조성공사에 착수했고, 금강산 관광은 당일 관광 등 상품의 다각화를 통해 2005년 6월 누적 관광객 1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2007.5.27. 내금강관광 개시 2007.5.27. 내금강관광 개시

2006년 북의 미사일 발사에 이은 핵실험으로 다시 한 번 벼랑 끝에 서게 됐지만, 현정은 회장은 “단 한 명의 관광객이 있어도 금강산 관광은 할 것”이라며, 의연 하게 위기를 돌파했고, 2007년 5월에는 표훈사, 보덕 암, 묘길상 등의 역사유적이 살아 숨쉬는 내금강까지 금강산 관광 지역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남북경협이 활기를 띠면서 남북관계는 또다시 중대한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2007년 10월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이때 발표한 ‘10·4 선언’에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거의 모든 실천적 방안이 담겼고, 남과 북은 다시 한 번 ‘상호존중과 신뢰’의 관계로 높아졌다. 현대의 남북경협도 2007년 11월 백두산 관광과 개성 관광을 합의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07.10.31. 백두산 현지답사 2007.10.31. 백두산 현지답사

2007.12.5. 개성관광 개시 2007.12.5. 개성관광 개시

현대는 북측 지역을 통해 백두산을 답사하고, 서울백두산 직항로를 이용한 관광을 추진하는 한편, 2007 년 12월에는 개성지구의 역사 유적과 명소들을 중심으로 한 개성 관광을 시작하여 초기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어갔다. 그 사이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관광’ 을 준비하기 위해 현장 답사를 마쳤고, 2008년 3월에 는 ‘자가용 관광’까지 실현시키며, 2005년 이후 3년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다.

남북경협 10년, 고난과 극복 되풀이

그리고 2008년이 밝았다. 2008년은 금강산 관광 10주년, 평양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5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또한, 국제관광지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시공한 ‘금강산골프장’과 이산가족 상시 상봉을 위해 건립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의 개장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 7월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이후 남북경협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정세와 맞물려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현대가 이끌어 온 남북경협 10년은 고난과 극복이 되풀이된 역사였다. 자금난으로 소중한 시설을 매각해 야 했던 2001년, 태풍 ‘루사’로 금강산 관광 노정이 파괴됐던 2002년, 정몽헌 회장이 타계한 2003년, 북의 핵실험으로 대규모 관광취소 사태가 벌어졌던 2006년 등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듯, 첫배 금강호가 동해항을 출항했던 1998년, 군사분계선을 통해 땅 길이 열린 2003 년, 개성공단 첫 제품이 생산된 2004년, 개성 관광을 시작한 2007년 등 벅찬 감동의 순간도 많았다.

2004.3.13. 남북 대학생 상봉모임 2004.3.13. 남북 대학생 상봉모임

남북경협의 큰 결실은 남북이 서로 대결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했다는 것 이다. 반세기 분단의 벽을 허물고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으로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학자·청소년·종교인·예술인·노동자·농민 등 남북 각 계의 사람들이 북녘 땅에 모여 마음속 통일을 나누며 민족 화해와 협력을 몸소 실천할 수 있었다.

2018.8.20. 제21차 남북 이산가족상봉 2018.8.20. 제21차 남북 이산가족상봉

또한 50년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산가족들의 한을 푸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금강산에서만 18차례 진행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해마다 수 없이 감동의 눈물을 훔치게 했다.

이보다 더 큰 성과는 남북 신뢰의 기초를 다진 경험이다. 1998년 남측 관광객이 금강산에 첫발을 내딛을 때만 해도 남과 북은 서로가 낯설고 두려운 상대였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굳은 표정은 온화한 미소로 바뀌고, 거리낌 없이 남측 손님을 맞는 북측 봉사원들의 모습은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125개 남측 기업이 공장 불을 밝히며 5만여 명의 북측 근로자들과 같은 목표로 함께 일했던 개성공단은 남과 북이 함께 갈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줬다. 자라온 환경과 생활방식은 달라도 각자의 바람이 하나가 되어 높은 성과를 거둬냈다. 이렇게 쌓인 남북의 신뢰는 중 대한 남북교류를 견인할 수 있었고, 다양한 협력 사업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 중단 등 남북경협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남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삐걱거렸다. 90% 가까운 직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현대아산은 물론 모든 남북경협기업들이 이미 한계 상황을 넘어선 지 오래다. 특히, 금강산 관광이 10년 넘게 멈춰서면서 그 문턱을 지켰던 강원도 고성 길목은 폐업한 상점들이 즐비하고, 기약 없이 상봉을 기다리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의 한숨도 무겁다.

남북의 평화와 번영이 완전해지는 그날까지

남과 북이 함께 걸어온 길에는 언제나 큰 장애와 걸림돌이 있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길이었기에 감당할 수 없는 위기와 난관조차 기꺼이 이겨낼 수 있었다. 10년 넘게 지속돼 온 지금의 역경 또한 이제 그 끝이 서서히 보이고 있다.

남북 정상은 지난해 3차례 소중한 만남 속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포함한 남북경협의 정상화를 약속하고 또 다짐했다. 새해에도 두 정상은 신년사 등을 통해 “아무런 조건과 대가 없는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재개”, “재개를 위한 남북 사이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라며 강력한 실천의지를 표명했다. 이제 남북경협을 향해 가는 ‘터널의 끝’에 다가선 느낌이다.

현대의 남북경협 사업도 10년이 넘는 극심한 고통을 끝내고, 또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업이 중단된 10년 동안 쉼없이 품었던 열망으로 치열하게 준비한 사업계획을 다시 한 번 크게 펼쳐야 할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현대아산이 2월 5일 ‘창립 20주년’을 맞게 됐다. ‘가동 10년, 중단 10년’이라는 반쪽짜리 성적표로 20세 성인식을 치르면서, 지나온 험한 세 월에 수많은 감정이 북받친다. 하지만, 앞으로도 변함없는 소신과 사명으로 멈추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향한 남북경협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은 분명하다.

현대아산이 지난 10년간 기다려온 것은 단순한 사업 재개가 아니라, 지난 세월 동고동락해온 남북의 모든 길동무와 함께 손잡고 다시 그 길을 걸어갈 순간이다. 험난했지만 함께였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세월, 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눈물을 삼키며 걸어온 이 길은 남북의 평화와 번영이 완전히 이뤄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김 한 수 김 한 수
현대아산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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