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위원 라운지

3·1운동 정신은 화합, 남남화해가 남북화해의 단초입니다 “우리의 주도성이 발휘된
남북 교류와 접촉 필요”

민주평통에는 2만여 자문위원이 각계각층에서 평화통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삶과 평화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새롭게 준비한 코너 ‘자문위원 라운지’. 첫 번째 순서로 실향민 자문위원을 만났다. 민주평통 자문위원 및 이북5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향민 1·2 세대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대담 ]
안승준 자문위원(황해도중앙도민회 수석부회장)
길형환 자문위원(평안남도 덕천군 명예군수)
박성완 자문위원(평안북도 삭주군수)
심경모 자문위원(함경남도 대표위원)
이광자 (함경북도 부녀회장)

최근의 한반도 상황은 ‘기회, ’, 우리가 주도성 가져야

길형환 | 지난해에 개최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출발점이었다고 봅니다. 북한도 핵 실험장 폐쇄, 비무장지대 내 GP철수 등 나름 성의표시를 했고요.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남북관계 개선,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요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심경모 | 북한에 대해 우리 정부가 너무 저자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북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만 양보하는 것은 안된다고 봅니다.

안승준 | 사실 우리 이북5도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기 힘들어요. 남북이 화합하는 정책은 좋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분단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만큼, 그 부분을 고려하면서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이광자 | 이제 저와 같은 실향민 1세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향이 그립고 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 럴 수 없잖아요.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풀렸을 때 길이 열려서 명절에 성묘라도 갈수 있는 날이 오 면 좋겠습니다.

박성완 | 작년에 남북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저는 이것을 기회라고 봅니다. 그 기회를 잘 살려서 통일의 방향으로 가고 경제발전도 이뤘으면 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저와 같은 2세, 3세들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접촉과 교류 필요, 늦기 전에 고향땅 밟았으면

안승준 | 저는 북한과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은 찬성합니다. 다만 일방적으로 그쪽에 맞추는 건 문제가 있다 고 봐요. 교류를 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 문화교류가 되면 인적교류로 이어집니다. 인적교류 는 경제교류로 이어지죠. 이 삼박자가 맞으면 자연스럽게 사상교류도 이루어지고 통일의 비전이 보일 겁니다.

길형환 | 독일은 수십년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꾸준히 사전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고 해요. 우리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지속가능한 통일정책을 만들면서 점진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심경모 | 해방 후 6·25 이전에는 남북 간 서신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그때처럼 교류하면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금강산에서 짧게 하고 끝내지 말고 북측 가족이 남측으로도 와서 오랫동안 같이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성완 | 저희 아버지가 1933년생이신데,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세요. 북에 가도 만 날 사람도 없고,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도 남아있지 않겠지만 저희 아버지 같은 분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고향의 풍경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광자 | 저는 함경남도 길주가 고향인데, 지금은 길주에 핵 시설이 들어서서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고향땅 한번 밟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앞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서로 화합해서 동포끼리 함께 잘 살았으면 합니다.

국제사회 협력과 우리 내부의 균형도 중요

박성완 | 문화교류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드라마 나 공연을 볼 때 북한의 젊은 세대가 느끼는 감정이 생 각보다 크다고 해요. 동시에 간과하기 쉬운 한미동맹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가야 한다고 봅니다.

심경모 | 북한이 반드시 핵을 포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고 실력도 있어요. 우리가 당당하게 주도권을 잡고 가야 합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일본 등 우방과도 협력하면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이광자 |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통일에 대비해야 하고, 북한과 접촉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북 보다 잘 사니까 우리 동포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야 하 지만, 저자세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안승준 | 지금까지는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어서 국민들이 혼란스러웠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통일 정책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공감대를 바탕으로 통일법을 만들고 통일정책을 추진하면, 이념 갈등 도 줄어들고 통일정책의 지속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길형환 | 항시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정 집단의 전유물처럼 통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양하고 소통하면서 국민을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통일의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입니다. 이런 가치를 인식하고 실현할 때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 그리고 평화통일
실향민 1·2세대, 분단된 조국을 살아온 이들의 평화와 통일

“너무나 그리운 고향, 이제는 좋은 시대가 오기를”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18살 때 피난을 왔습니다. 그때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이북에서 공부한 덕에 공무원 시험을 봐서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1997년부터 이북5도청 활동을 시작했고, 길주부녀회장, 새마을 회장, 지금은 함경북도 중앙부녀회장, 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기운도 없어서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갈 것같아요. 어쩌다 고향 이야기를 들어보면 핵실험 지역이라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합창단 활동과 관련해서도 예전에는 실향민 1세대가 60명 정도였는데 이제는 30명 좀 안돼요. 2세대는 본업도 있고 지원도 부족해서 그런지 적응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여러 가지 고충이 많습니다만, 이제는 젊은 세대가 나서서 좋은 시대를 만들고 화합해서 교류하고 왕래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요. 2세대에게 거는 기대가 많습니다.

이광자 (33년생, 함경북도 길주)




“민주평통, 이북5도 활동이 나의 평화통일 운동”

함경남도 갑산에서 태어났고, 갑산 명예군수도 했어요. 지금은 함경남도 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장학활동도 합니다. 갑산은 ‘삼수갑산’이라는 말도 있듯이 험하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귀양 보낼 때 나긋나긋한 사람은 경상도, 전라도로 보내고 조금 악질이다 싶으면 함경도로, 그중에 가장 악질은 갑산으로 보냈다는 말이 있을 만큼 험한 지역입니다. 남쪽에는 14살, 6·25 동란 때 내려왔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주인공이 우리 동생 나이인데, 영화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6·25 때 흥남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에 내렸는데, 도민보다 피난민이 많았어요. 그 때 배의 선장이 라루라는 사람인데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 신부가 되었다고 해요. 미국 뉴저지 뉴턴에 그분 묘가 있어서 제가 가서 참배도 하고 왔습니다. 민주평통과 이북5도민회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평화통일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심경모(39년생, 함경남도 갑산)




“우리는 통일을 위한 밑바닥 일꾼이자 기초”

저는 3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서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 활동을 하면서 ‘자문위원은 대통령께 통일정책을 건의하고 자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자문위원 자격을 얻어 활동하게 된 것도 사실은 부모님께서 이북사람이고, 피난을 내려오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민주평통과 이북5도위원회 활동을 통해 통일아카데미를 진행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의 가장 밑바닥 일꾼이다, 기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 되든지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통일을 위해 매진하고 밑바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안승준(48년생, 황해도)




“평화통일 활동, 아버님의 한을 푸는 기회로 이어지길”

저는 실향민 2세대로 선친 고향이 평안남도 덕천군입니다. 민주평통 활동과 관련해서는 평화통일 아카데미 활동을 준비하고 진행을 맡아서 해왔습니다. 1기부터 3기까지 15회정도 했는데, 통일을 위해서는 남남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시작했어요. 선친께서 1949년에 단신으로 월남 하셨는데, 그해 5월에 북에 보낸 서신이 월남했다는 물증이 되면서 북에 남은 가족들이 몰살됐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이산가족이나 이북 문제를 감히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살아왔습니다. ’9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북5도 활동도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면민회장, 군 장학회장, 군민회장 등의 활동을 했는데, 이러한 일을 통해 아버님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길형환(54년생, 평안남도 덕천군)




“실향민 1세대 부모님과 공감하는 통로”

저는 실향민 2세로 평안북도 삭주군 출신이신 부모님께서 피난을 내려와 부산에 터를 잡으셨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이북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현재 민주평통 자문위원이자 평북 삭주군 명예군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민주평통에서는 송파구협의회에 소속되어 있는데, 현재 각계 각층 의 전문가와 명사를 모셔서 아침마다 ‘송파포럼’을 열고 통일 관련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71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렇게 지속하고 있는 곳은 송파구협의회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민주평통과 이북5도 활동을 하면서 아버지와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북한, 평화, 통일을 이야기 하면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얘기만 듣고 있었는데, 이제는 부모님과 대화거리도 생기고 공감대도 생겼습니다.

박성완(68년생, 평안북도 삭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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