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행 통일 여행

활동 사진 난정전망대를 찾은 관광객이 망원경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교동도에서 북한 황해도 연안군까지의 거리는 불과 2.3㎞이다. 北 연백평야가 턱밑에…
숱한 그리움의 흔적을 만나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는 북한 황해도 연안군을 마주 보는 최전방 섬이다. 전란을 피해 바다를 건넌 실향민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된 지도 70년이 다 돼간다. 시간이 자신의 작은 분신을 툭 던져놓은 듯한 곳, 교동도에서 살아가는 실향민의 이야기.

전쟁의 비극이다. 할아버지는 하루 사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고아가 됐다. 이전까지 부모형제, 고향 친구들과 평화롭게 살던 할아버지는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허둥지둥 고향을 떠났다. 그는 1·4 후퇴 때 월남했다. 잠시 전쟁을 피해 서해 작은 섬 교동으로 갔다.

그렇게 떠난 고향을 그리며 밤마다 베갯잇을 적신 지 어언 58년…. 쏜살같은 세월은 서른의 젊은이를 흰 머리 덮어쓴 노인으로 바꿔놓았다. 2009년 봄, 할아버지는 평생 북녘만 바라보다 눈을 뜬 채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할머니는 홀로 교동도에 남아 잡화점을 운영한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손수건에 새긴 시(時) 한 수가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위해 지은 헌시(獻詩)의 앞부분이다.

격강천리라더니 / 바라보고도 못 가는 고향일세 /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 가련만 / 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

인천 강화군 교동도는 북한 황해도 연안군과 마주하는 최전방 섬이다. 전란을 피해 바다를 건넌 실향민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된 지도 어느새 70년이 다 돼간다. 배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교동도는 이제 두 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2014년 강화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놓여 배를 탈 일도 없다. 서울 도심에서 차로 1시간 40분가량 달리자 한적한 시골길에 접어든다. 드넓은 들판너머로 한껏 짙어진 단풍이 산야를 뒤덮는다. 도시에서는 눈치 채지 못한 늦가을이 깊어가는 모습이 창가에 스친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에서 머플러를 두른 듯 황금색 단풍이 물결을 친다. 이제 이곳도 서서히 겨울로 접어들 것이다.

“저 하늘 아래 부모형제가…”

교동도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강처럼 폭 좁은 바다를 끼고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교동대교 건너기 전 길목에서 무장한 해병이 막아선다. “실례지만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길목에서 해병이 건조한 어투로 묻는다. 방문 신청서에 ‘교동도 관광’이라고 썼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제야 해병이 해병대 제3167부대장이 발급한 ‘임시 출입증’을 건넨다.

섬은, 아니 평야는 넓고 깨끗하다. 드넓은 교동평야 뒤로 섬들과 산이 교차해 내다보인다. 넓은 황금벌판과 서해의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루는 교동도에는 논이 약 2640만 ㎡, 밭이 660만 ㎡로 모두 3300만 여 ㎡의 농경지가 자리한다. 강화도에서 경작지 면적이 가장 넓고, 가구당 경지면적도 가장 넓다. 교동도 쌀이 유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놓여 차로도 갈 수 있다(왼쪽). 넓은 황금벌판을 자랑하는 교동도는 겨울이면 철새 떼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남북 공동의 한강 하구 수로 조사가 시작된 9월 5일. 남과 북은 교동도 북단 한강 하구에서 만났다. 남북이 조사하는 공동이용수역은 남측의 김포반도 동북쪽에서 교동도 서남쪽까지, 북측은 개성시 판문군 임한리에서 황해남도 연안군 해남리까지 70km이다. 교동도 주민들은 “달라진 남북관계를 몸소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교동도를 포함한 한강 하구 수로는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한 민간 선박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남북 간 우발적인 충돌 가능성이 높아 사실상 자유로운 항행은 불가능했지요. 앞으로는 9·19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한강 하구 수로 이용이 가능해졌어요. 이번 공동 조사로 남북한이 첫걸음을 뗀 셈입니다.”

실향민 2세 김영애 우리누리평화운동 공동대표의 설명이다. 민주평통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김 대표는 교동도 실향민 어르신들 삶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교동도에서 다양한 평화운동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남북관계 해빙 분위기를 타고 최근 학교, 기업, 정부 부처, 연구소 등에서 교동도로 견학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주민들도 움직인다. 7월 27일 강화 주민 300명이 외포리에서 ‘평화의 배’를 띄워 석모도와 교동도를 항행했다. 강화 ‘평화의 배’ 행사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정전 기념일마다 열리다가 중단된 지 10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김 대표는 “남북 간 뱃길을 여는 것은 우리 민족이 살 길을 여는 것이고, 이 뱃길은 철길, 하늘길과 함께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며 “특히나 한강 하구 중립수역 항행은 남북 평화협력과 통일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념의 벽 아래 놓인 교동도

교동대교를 건너면 섬 주민들의 생활 중심인 대룡시장이 있다. 교동면사무소 아래 위치한 시장으로, 6·25 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란 온 주민들이 고향의 연백시장과 비슷하게 만든 골목시장이다. 교동도는 북한과 가까운 민간인 통제지역인 까닭에 발전이 더뎠다.

그 영향 탓인지 대룡시장 입구에 다다르자 한 장의 정지된 사진을 보는 듯 모든 것이 멈춰 있는 풍경과 마주한다. 시간이 자신의 작은 분신을 툭 던져놓은 것처럼, 이곳은 1960~1970년대에 멈춰 있는 듯하다. 슬레이트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교동은혜농장, 수지큐-우, 청춘브라보, 거북당, 제이다방, 대룡잡화점, 동산약방, 교동이발관, 중앙신발, 떡방앗간, 교동다방이 이내 나타난다. 소박하고 아담한 규모로 가게를 만들고 손 글씨로 글자를 새긴 간판을 내걸었다. 가게마다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들어서 있다. 삼진상회 주인은 “4년 전 어느 날 제비가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며 “내년 봄이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남북관계 훈풍으로 북한 황해도와 맞닿은 교동도를 향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룡시장 담장에는 정겨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옛날 뻥튀기 과자를 만드는 모습, 할머니가 손주에게 국수를 먹이는 그림이 애틋하다. 옛 표어와 포스터도 새겨져 있다.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기생충 박멸하여 내 건강 내가 찾자’, ‘너도나도 쥐 잡아 100만석의 증산보자’…. 시장 구석구석에 옛 풍경을 그린 그림과 표어들이 정겹던 시절로 데려다준다.

김 대표와 함께 대룡시장 내 대룡잡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실향민 어르신에게 인사하라”면서 김 대표가 주인을 부른다. 9년 전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할머니가 이분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가게 문을 닫고 등을 돌린다. 지난날을 꺼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잡화점에서 시 한 수가 새겨진 손수건 두 장을 사고 조용히 나왔다.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대룡시장 교동은혜농장에서 관광객이 현미를 구매하고 있다.

“좌익과 우익이 서로를 죽였어요. 이것이 교동도 사람들에겐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죠. 지금도 교동도에는 이들이 살을 맞댄 채 살아가고 있답니다.” 김 대표가 가게 문을 닫으며 말한다.

북쪽을 조망할 장소는 두 곳이다. 대룡시장 왼편에 자리한 난정전망대로 향한다. 난정저수지라 이름 붙은 저수지 언덕에 전망대가 있다. 날이 맑을 땐 북한 땅이 맨눈으로 훤히 보인다. 가장 가까운 곳은 2.3㎞ 떨어져있다. 동쪽 교동대교를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조금씩 눈을 돌리면 북녘 땅을 조망할 수 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지도상의 ‘연안군’은 눈으로 짚어지지 않는다.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면 서북쪽 휴전선 너머로 너무 가까워 믿기 힘들 정도의 거리에 황해도 연백평야가 뿌옇게 펼쳐져 있다.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멈춰버린 대룡시장의 담장. 일제시대 ‘브나로드 운동(농촌 계몽운동)’ 포스터가 붙어 있다.

6·25전쟁 이전까지 교동도는 남쪽보다 북쪽과 같은 생활권이었다. 음식은 물론 생활문화가 비슷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도 주민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불과 3㎞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 연안장터를 구경하기 위해 당시 국민학생들이 수영을 해서 건너기도 했다고.

주민 이수철 씨는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된 이후 남한의 경기도 땅이었던 연백평야가 북한령이 됐다”면서 “연백평야가 고향인 실향민들의 눈가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교동도 서북쪽 끝에 실향민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 망향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정면으로 황해도 연안군이 가깝게 보인다.

실향민 애한, 그들을 위로하는 것

교동도 서북쪽 끝에 있는 망향대에서도 북녘 땅이 가깝게 보인다. 이곳 역시 정면은 황해도 연백평야다. 지금의 북한 연안군이 눈앞에 잡힐 듯 보이는 곳에서 실향민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는 망향대에는 무료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낮은 푸른색 집과 높은 탑 같은 구조물, 양식장으로 보이는 풍경이 망원경 속에 잡힌다. 교동도는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철책이 설치돼있다. 주민들은 “철책이 없던 때는 고기를 많이 잡았다. 여기가 원래 숭어잡이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다시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해 지은 헌시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격강천리라더니.’ 격강천리(隔江千里)는 강을 사이에 둔 것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오고 가기가 불편해 천 리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교동도 실향민 30여 명이 언제 북녘 고향 땅을 밟을지 알 수 없다.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가는데 어찌….

100여 명의 광주 지역 청년들은 남북 양측의 국방부, 국토교통부,교육부, 문화체육부, 보건복지부,외교부 등 6개 부처에 소속돼통일 한반도를 위한 각 분야별정책을 토론하고 논의하는시간을 가졌다. 교동도 월선포구에서는 서해 바다를 검붉게 물들이는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벽란도로 가는 배가 드나들었던 월선포는 고즈넉하다. 어느새 바다가 검붉은 빛으로 높게 출렁거린다. 대지가 어둠을 맞이하는 시간. 민간인 통제구역인 이곳은 밤 12시부터 이튿날 오전 4시까지 통행이 제한된다. 너무 늦지 않게 섬을 빠져나가기로 한다. 고향을 지척에두고 가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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