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보가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북 정상이 2018년 한 해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만나 남북관계에 신뢰를 쌓아가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엇갈린다. 미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기득권을 행사해온 이들이 믿을 수 없는 나라 ‘북한’과의 대화에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과거의 경험을 들어 한반도 평화 움직임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민주평통이 주최하고, 영국협의회가 주관한 ‘한·영 피스포럼’은 영국 사회에 한반도 평화를 향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최근 남북관계 변화 및 북·미 협상에 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을 들어보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번 포럼은 지난 11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한국과 영국의 학자를 비롯해 전직 관료, 교민 등 15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영국은 서유럽 국가 중에서도 가장 많은 한인이 거주하는 나라다. 영국에 살고 있는 재외한인은 약 4만 명(외교부, 2017년 기준).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다음으로 교민이 많다. 이처럼 영국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한인들이 모여 살아간다. 영국에 정착한 대부분의 한인들은 멀리서나마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큰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영국에는 탈북민도 적지 않다. 영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은 약 700명으로, 대부분 런던 남부 뉴몰든 지역에 모여 살고있다. 런던 남부에 위치한 뉴몰든은 대한민국 교포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다.
“비핵화만이 북한 향한 불신 불식시킬 수 있어”
최근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영국 교포사회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탈북민들이 최근 한반도의 변화, 남북관계 방향과 속도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고, 북한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진 일부 한인들이 한반도 평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교민들이 지금이 남북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점을 내세우며 재외동포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한반도 정세가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등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번 포럼의 대주제는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이다. 1부 행사는 김덕룡 수석부의장의 기조연설로 닻을 올렸다. 김 수석부의장은 기조연설에서 최근 남북 정상의 노력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기존 냉전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남·북·미 정상이 직접 만나 불신관계를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핵 없는 세계로의 거보(巨步)를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이어 “북한이 비핵화라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나서서 여건을 조성해주는 결단이 필요하다”면서 “한국 정부는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내용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북·미 간 협상을 견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럼에 참석한 한국 측 참가자와 교민뿐만 아니라 영국 전문가들은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냉전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일대의 ‘대전환’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날 주제발표는 영국의 대표적인 한국 전문가 에이단 포스터 카터 영국 리즈대 명예 선임 연구원이 맡았다. 그는 과거 몇 차례 남북관계의 변곡점을 분석하고, 지금의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실제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에이단 포스터 카터 선임연구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부의 노력이 지금까지의 한반도 평화 논의에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지금부터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이 성공적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좀 더 확실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에 더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다소 무리라는 의견도 있긴 하지만, 비핵화라는 확실한 행동만이 지금까지의 북한의 행보로 야기된 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큰 결단 없이는 한국 정부의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외국 석학의 날카로운 지적은 한국 학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2부 행사에서 진행된 발제와 토론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한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최완규 신한대 설립자석좌교수(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 원장)의 사회로 김용현 동국대 교수, 마틴 유든 영한협회 회장, 존 헤밍스 핸리잭슨협회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가 각각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김용현 교수는 “이미 국제문제가 돼버린 북핵 문제와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며 “특히 기존 6자회담 당사국이 아닌 유럽의 지지가 필연적”이라고 강조했다.
“의지 있다면 남북관계 개선 가능하다는 것 보여줘”
특별히 영국의 역할이 강조되는 이유는 국제사회에서의 중요성 때문이다. 영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동시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도국이며 북한과의 수교국으로, 한반도 평화 구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위치에 있다. 6·25전쟁 참전국이기도 한 영국은 한반도와 인연이 깊다는 점에서 그 역할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발제를 맡은 마틴 유든 회장은 남북 간 군사적 합의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는 “이는 남북이 의지만 있다면 복잡한 법률 절차 없이도 남북관계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북한은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유엔의 대북제재는 당분간 지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핵무기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폐기 없이는 북한의 평화 의지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또 “국제사회는 좀 더 적극적으로 북한과 교류해야 한다”면서 북한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관들이 적극 움직여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북한의 인권 문제가 향후 한반도 평화 정착에 선행돼야 할 조건 중 하나라고도 언급했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 가능성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분석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행보가 외부의 압력에 대한 대응 차원이라기보다는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중산층 요구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경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는 이제 과거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것”이라며 “김정은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의지가 커 보인다”고 평가했다.
마지막 발제자인 존 헤밍스 소장은 “국제사회의 현실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면서 당사국인 남·북·미의 역할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는 “한반도가 중요한 기회를 맞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만약 비핵화 프로세스가 지연될 경우를 대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날 포럼에선 플로어 토론이 펼쳐졌다. 플로어 토론은 주장, 질문을 포함한 모든 발언을 지정된 장소에 나와 발언하는 토론 형식이다. 포럼에 참석한 재외한인들과 영국 전직 외교관, 학자 등도 토론에 적극 참여하며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방안을 도출하는 데 머리를 맞댔다. 영국의 전직 관료, 학자들은 대체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환영하고 지지하는 한편 한반도 비핵화의 과정을 낙관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그 이유로 “북한이 신뢰할 만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에게 북한은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어긴 불량국가로 각인돼 있는 것이다. 북한의 심각한 인권 상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 또한 큰 상태다. 영국 측 참가자들의 현실주의적 접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우려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영국 정치인·학자 ·교민사회에 협력과 지지 요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 참석자와 교민 대부분은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냉전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일대 ‘대전환’의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국제정치적 패러다임에서 포착되기 어려운 기회의 공간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지고 있어서다. 이들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협력과 지지를 요청했다.
특히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 영국 정치인들과 지식인, 교민사회가 적극 나서서 한반도의 변화를 설명하고, 평화를 위한 힘겨운 여정에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한·영 피스포럼’에 참석한 참가자들이 행사를 마무리하는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번 포럼은 한국 정부가 만들고자 하는 한반도 평화가 모든 이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작금의 현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였다. 유럽은 한반도 문제의 이해 당사국이 아니지만, 보편적 기준에서 인권이나 대량살상무기의 위험과 같은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는 향후 유럽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북한이 반드시 고려해 개선해야 할 대목이다. 또한 한국이 ‘운전자론’을 주장하며 비핵화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최근의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여러 채널을 통해 국제사회와 소통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