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교사로 재직하다 해직된 인사가 33년 이후 다시 교육계로 돌아오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유시춘(67) EBS 신임 이사장 이야기다.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그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결성식에서 사회 본 일을 계기로 1985년 서울 장훈고에서 해직됐다. 그 해직교사가 올 9월 17일 대한민국 교육방송의 중심 EBS 이사장으로 귀환했다.

유 이사장이 1990년대 재야에서 민주화의 가치를 일깨우자는 차원에서 시민학교 형태의 학교를 기획하고 강의해온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뿐이랴. 민가협 총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을 거치며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2001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2008년엔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했다. 민주평통과도 인연이 깊다. 유 이사장은 2006년(12기)과 2007(13기)년 민주평통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BS는 국민 누구나 평등하게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는 목적 아래 ‘공영교육방송’의 시대를 이끌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등 일부 계층만이 아니라 전 국민, 전 계층에 유용한 교육방송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다. EBS의 올해 슬로건은 ‘Restart 2018 - 교육이 세상을 바꿉니다’. 올 6월 EBS가 터전을 옮긴 일산 신사옥 곳곳에 이 문구가 붙어 있다. 이는 시대가 요구하는 공영교육방송만이 할 수 있는 과제를 찾아 움직이겠다는 뜻일 터이다.

EBS가 당면한 시대의 흐름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 평화 시대다. 그런 대한민국 대표 교육방송사에 재야의 인사가 이사장으로 온 것이다. 민주화운동가는 한반도의 역사적 대전환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EBS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어떠한 교육 콘텐츠를 선보일 것인가.

“EBS가 남북 교육 교류 앞장설 것”

- 이사장 취임 이전부터 EBS 애청자이셨다고요. 애청자가 이사장이 된 셈입니다.

“평소 텔레비전을 자주 보지 않지만 EBS 채널은 즐겨찾기로 저장해둘 만큼 자주 봐요. 특히 다큐멘터리, 문화 프로그램을 좋아하지요. 교사였던 때나 소설 쓰던 때나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하던 때나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은 미래 세대를 정의로운 시민으로 길러서 좋은 국가,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겁니다.

어른으로서 후세대를 위해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랄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국민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는 공영교육방송인 EBS에서 일하게 된 것 또한 일관된 내 소명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늘 하던 대로 강의하고 글을 씁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민주화 관련단체에서 일할 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익근무’를 했지만, 지금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지요(웃음).”

- 교육계의 남북 교류 논의가 활발합니다. EBS는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요.

“교육도 시대와 국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남북 평화 프로젝트가 세계적 관심사로 부상하는 이 시점에 EBS가 남북 교류에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올 6월 신설된 남북교육교류추진단(이하 추진단)은 한반도 평화시대에 발맞춘 행보라 할 수 있어요. 추진단은 남북 간 방송통신 부문의 상호교류와 협력 증진을 위한 전담 조직이에요.

남북 간 교육·문화 교류 활성화와 공동 콘텐츠 기획, 제작을 추진하는 것이 목표죠. 그동안 EBS가 구축해놓은 수 많은 양질의 교육 콘텐츠를 북측에 제공하고자 해요. 다만,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으니 동질성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두고 남북의 간극을 차차 좁혀가야 할 것입니다.”

-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콘텐츠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정치, 이념과 무관한 비정치적인 콘텐츠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과학교육, 물리교육,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교육 등의 콘텐츠를 북측에 제공하는 거죠. 오천년 역사를 함께해온 남북은 한민족 공동체로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잖아요. 남한의 심청이 얘기나 콩쥐팥쥐 등 전래동화 콘텐츠를 북측에 제공할 수도 있겠죠.”

유시춘 EBS 신임 이사장은 “교육도 시대와 국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올 6월 EBS가 신설한 남북교육교류추진단은 한반도 평화시대에 발맞춘 행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자연, 동식물, 문화유적 등도 남북의 민족성을 찾는 좋은 소재가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마침 EBS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 : 새로운 낙원’이 12월 2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중국에선 이미 11월 11일 개봉했고, 개봉 첫날 오피스박스 4위에 오르는 등 순조로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해요. 영화의 스토리는 재난을 당해 모든 가족을 잃은 상처 많은 아빠 ‘점박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막내’의 납치 소식을 접하고 막내를 찾는 여정을 담았어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 어린이도 공룡을 좋아한다고 해요. 더군다나 한반도에 공룡이 많이 살았잖아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울답방 때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점박이’를 관람하면 어떨까 해요. 남북 정상이 점박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한반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남북이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평양 방문 때 북한 테마기행 기획안 전달

EBS가 야심차게 준비하는 기획은 또 있다. 추진단은 북한의 자연과 문화유산들을 EBS 대표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 형식으로 소개하고자 준비 중이다. 일명 ‘북한 테마기행’이다. 이는 한국의 명사들이 북한 전문가들과 동행하며 70년째 못 가본 묘향산, 개마고원, 원산 앞바다. 두만강, 백두산 등 그리운 북한의 산하를 제대로 보여줄 남북 평화 프로젝트다. 유 이사장은 “세계 테마기행이 지금껏 북한만 빼고 세계 곳곳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 ‘북한 테마기행’ 방송이 가져다주는 기대 효과는 무엇인가요.

“우선 자연과 문화유산을 다룬 북한 테마기행 방송은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어요. 실제로 EBS가 만든 세계 테마기행을 보고 그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요. 북한 테마기행은 남북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남북한 전문가가 한 화면에서 동행하고 소통하는 모습만으로도 한반도 평화의 당위성과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통일교육과 평화교육을 위한 영상 교재로도 활용 가능하고요. 무엇보다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들에게는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는 소구점이 될 겁니다.”

올 10월 ‘10·4 남북 공동선언 11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유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북측 고위인사에게 북한 테마기행 기획안을 전달했다. 유 이사장은 “북측의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올 11월 3일과 4일 1박 2일 일정으로 금강산을 방문한 유시춘 EBS 이사장이 방북단의 안내를 맡은 분홍색 옷을 입은 북한 여성(오른쪽)과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 올 10월 평양에 이어 11월엔 금강산을 다녀오셨습니다. 방북 소회가 궁금합니다.

“평양 방문은 처음이었어요. 방북 전날 소풍 가는 중학생처럼 설레서 잠을 못 잤죠. 서해 직항로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때 비행기 창밖으로 본 첫 풍경은 마치 강화 교동도에서 서해의 작은 무인도를 내려다보는 듯했어요. 백령도에서 황해도 장산곶까지의 거리가 14km라고 하잖아요. 일산 자택에서 신촌 정도 거리에 불과하죠. 옥류관 오찬장 밖 베란다에서 대동강변과 주변 건물들이 보였는데, 마치 강변북로 카페에서 여의도 밤섬과 국회의사당을 보는 듯했습니다. 전직 통일부 장관들과 같이 다니며 일정을 소화했어요. 동행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평양이 달라졌다며 무척 감격해하더군요.”

- 11년 만에 금강산을 방문하셨다고요. 무엇이 달라졌던가요.

“2006년 마지막으로 금강산을 갔을 때 보초병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보초병이 보이지 않더군요. 방북단을 안내하는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북한 여성이 삼일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삼일포 풍경을 남북한 인민이 함께 봐야 하지 않겠습네까”라고 덧붙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요. 통제사회인 북한에서는 위의 생각이 아래로 내려오잖아요. 북한이 과거와 달리 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남북 교류에 대한 북한의 열망과 기대감도 느낄 수 있었고요.”

-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앞두고 미래 세대에 대한 평화·통일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가 해온 통일교육을 진단한다면.

“지금까지의 통일교육은 안보, 이념 대결 위주의 교육이 골간을 이뤘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 보수적인 통일관은 한반도 평화 이행기로 들어서는 시대적 조류에 맞지 않습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최근 남북관계를 염두에 두고 반공 일변도의 이념교육 차원에서 벗어나 통일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며 변화된 남북관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종합적인 통일교육이 추진돼야 해요. 통일교육 도입이 시기적으로 이르다면, 평화교육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니까요.”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가 한국 사회의 희망”

1987년 6월 항쟁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겐 독재에 대한 기억이 없다. 누구나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30대 초반 이하 젊은 세대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무찌르는, 제한과 금기로 점철된 사회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란 세대이다.

유 이사장은 “젊은 세대가 자유분방하고 아이디어가 기발한 이유는 이 때문”이라며 “방탄소년단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한류의 힘이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고 해석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한국 사회의 희망”이라고도 했다.

- 평화체제 이행기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요.

“남북 지도자의 결단이 결실을 맺으려면 구성원들로부터 지지와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이를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가 북한을 적으로 인식하는 일부 시니어층의 심리입니다. 이들의 심리상태 근저에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있어요. 이들이 북한을 한민족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바로잡아줘야 해요. 그 역할을 민주평통이 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