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6년 8월 12일 열린 북한 평양 대동강 맥주 축전에서 행사 보조원이 맥주를 채운 잔을 배달하고 있다(왼쪽). 북한에서 많이 마시는 대표적인 병맥주는 대동강맥주다. 7월 3일 오후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연대’ ‘합작’ 정신으로
평화의 기차에 올라타는 南北

1919년 한국인은 독립으로 평화를 얻기를 바라며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로부터 100년, 남북 평화 무드 속에 두 정상은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약속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평화의 기차에 올라 한반도를 종단하는 일이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앙과 지방정부는 물론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2018년 7월 3일에는 국가 차원에서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조직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처럼 한반도에 불어온 평화의 훈풍은 100주년 기념사업의 뜻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3·1운동은 남북 모두가 높이 평가하는 독립운동이다. 다만 임시정부에 대한 남과 북의 입장은 다르다. 그러나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연대와 합작의 가치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아 여전히 유효하다.

매년 3월 1일이면 전국적으로 3·1운동을 기념하거나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치르는 행사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체가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간 듯하다.

남과 북이 함께한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펼쳤다. 하지만 3월 1일 서울에서만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를 비롯해 평안북도 선천과 의주, 함경남도 원산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서울보다 앞선 이날 오후 1시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교회와 회당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내로 뛰쳐나와 연합시위를 벌였다.

기독교 계열 학교 학생들도 함께 가세해 ‘만세’를 외쳤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 감리교와 감리교계 학교 교사들이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안주에서 오후 5시 일어난 만세 시위는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선천에서는 장로교계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이날 정오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나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들도 가담했다. 의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천도교인이 가세한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원산에서는 오후 2시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연대해 만세 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했다. 이처럼 서울을 포함해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종교 연대와 학생 연대를 기반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이처럼 3월 1일 만세 시위를 벌인 7곳 중 서울을 제외한 6곳이 모두 북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한 것인 만큼 천도교와 기독교 교세가 강했던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지역에서도 함께 사전 준비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월 1일 이후에도 이들 지역 6곳은 물론 북부 지역에서도 매일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시위 중 약 71%에 해당하는 197회가 북부 지방에서 일어났다. 3월 초순 북부 지방에 집중됐던 만세 시위는 3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중남부 지역으로 확산됐고, 3월 말에서 4월 초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치열하게 일어났다. 유관순이 앞장선 병천 만세 시위 역시 4월 1일 일어났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반도 남단에서 북단까지 방방곡곡 일어난 만세 시위를 남북이 함께 재현하는 기념사업을 진행하면 어떨까. 3월 1일 서울과 북측 6개 도시에서 시작해 마을마다 1919년 당시 만세 시위가 펼쳐졌던 날에 맞춰 만세 시위를 재현한다면, 3월부터 4월까지 날마다 한반도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구호는 독립 만세가 아니라 ‘평화 만세’를 부르면 좋겠다. 남과 북이 함께 외치는 평화 만세는 남북 분단으로 쌓여온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의 봄을 기약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맛이 연하고 깨끗하며 거품성이 좋은 대동강 1번 맥주는 북한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위). 북한에선 캔맥주를 ‘떼기식 통맥주’라고 부른다. 대동강 떼기식 통맥주는 2017년부터 생산됐다. 7월 3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에서 개최된 대통령 직속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

3·1운동을 전후로 임시정부‘들’이 탄생했다. 먼저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상설위원 15명이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회’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실제로 는 입법, 사법, 행정 기능을 하나의 기관에 담아낸 조직체로서 대통령제를 지향한 기관이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이 한창이던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공식 출범했다. 1919년 4월 10일에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를 제정하는 등 정부 수립 절차에 들어갔다. 다음 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반포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국내에서는 3월부터 한성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만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 명단이 해외 언론을 통해 국외에 알려졌다. 4월 17일에는 국내와 간도,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평안북도에서 ‘신한민국정부선언서’를 뿌리고 신한민국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신한민국을 만든 독립운동가들은 한성정부와 통합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탄생의 의미는 통일과 합작

상하이 임시정부는 3·1운동 전후로 수립된 임시정부‘들’을 통합하는 데 집중했다.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선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되,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의 양대 세력인 문창범계와 이동휘계 중 후자만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기로 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만들고, 한성정부 명단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내각을 선출했다.

맛이 연하고 깨끗하며 거품성이 좋은 대동강 1번 맥주는 북한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위). 북한에선 캔맥주를 ‘떼기식 통맥주’라고 부른다. 대동강 떼기식 통맥주는 2017년부터 생산됐다. 1921년 1월 1일에 촬영한 것으로, 앞줄 왼쪽부터 두번째가 김구, 2열 왼쪽부터 여섯 번째가 이동휘, 일곱번째가 이승만, 아홉 번째 이동녕, 열한 번째가 안창호이다.

이처럼 통합 임시정부는 통일과 합작의 정신에 기반해 탄생했다. 하나의 통합된 임시정부가 주권자치의 기구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당위성을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민족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가리지 않고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만든 사회주의자였다. 안창호는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이 필요한 이유로 ‘우리의 앞길에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일을 얻기 위함’임을 내세웠다. 그는 “통일하면 독립하고 아니하면 못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부패 타락한 부르주아 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파벌싸움 마당’에 불과하다. 남한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곧 건국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양자 간의 간극은 매우 커 보인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탄생 가치인 통일과 합작은 오늘날 남북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 한성정부, 평안북도 신한민국정부의 수립을 동시에 기념하며 그것이 통합 임시정부로 수렴되는 과정을 되짚는 기념사업이 이뤄진다면, 통일과 합작을 추구했던 임시정부 탄생의 정신이 재조명될 것이라 기대한다.

평화의 기차, 연대의 길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당시 한국 독립이 곧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 담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대한국민의회가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있다”고 단언했다. ‘기미독립선언서’도 2000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을 일으킨 한국인의 평화론을 간명하게 말하면 “독립하지 못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

연대는 3·1운동을 통해 저항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앞서 살펴봤지만, 1919년 3월 1일 7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종교 연대 혹은 종교계와 학생 간의 연대에 기반해 일어났다. 이러한 연대의 경험은 만세 시위와 함께 전국으로 확산됐다. 한국인 모두가 약자 처지의 식민지민으로서 계급,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만세 시위를 벌였다. 누구든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에 기초한 연대의식, 그것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만세 시위가 일어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1919년 한국인은 독립으로 평화를 얻기를 바라며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로부터 100년, 남북 평화 무드 속에 두 정상은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약속했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평화의 기차에 올라 한반도를 종단하는 일이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누군가는 판문점에서 6·25전쟁에 참가했던 20여 개국 군인들이 모여 평화축구대회를 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아뒀던 남북 평화와 화해를 위한 아이디어들을 실천에 옮길 때가 왔다. 하지만 남북 교류는 간절한 마음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남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잣대가 되는 기념사업이어야 한다.

1년 전 남북 간의 냉각기를 생각한다면, 여전한 대북제재의 난관 속에서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모여 기념식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진전이라 할 수 있다. 100주년의 3월이 평화를 염원하며 남과 북이 함께 맞는 봄이 되길 기대해본다.

박 경 석 김 정 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카카오톡 아이콘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카카오스토리 아이콘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