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10월 4일 미국 정치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 행사에 참석해 대중(對中)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시사하는 연설을 했다. 이는 2017년 12월 발표한 국가 안보전략 보고서에서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전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은 현 국제 정세를 ‘강대국 간 경쟁이 격화되는 새로운 시기’로 규정한 바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전략 경쟁자(Strategic Competitor)’로 규정하고, 현 ‘국제질서의 도전자(Revisionist)’라고도 표현했다.
허드슨연구소에서 진행된 이번 펜스 부통령의 연설은 9월 30일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운항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USS 디케이터호’에 중국의 뤄양(旅洋)급 구축함 함정이 45야드 거리까지 접근하는 등 ‘치킨 게임’을 벌인 직후에 발표된 것이다.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먼저 선수를 돌려야 했던 미국의 굴욕감과 분노, 비장하고 결연한 태도가 그의 연설에 잘 묻어나 있다.
신냉전 알리는 마이크 펜스의 연설
이날 펜스 부통령의 발언을 살펴보면, 중국이 미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려 했고, 미국의 연구자들과 기자들을 회유·협박하고 있으며, 미국의 희생을 기반으로 제조업의 토대를 구축하려 했다. 나아가 중국은 향후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를 통해 로봇공학, 생명공학, 인공 지능(AI) 등 세계 최첨단 산업의 90%를 장악해 종내에는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에 도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펜스 부통령은 비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7월 30일 (현지시간) 워싱턴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인도 ·태평양 경제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도둑질한 이 기술을 사용해 “쟁기를 검으로 바꾸는 방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아울러 미국이 기대하는 자유주의 정책 대신 중국은 이제 자국민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바탕으로 빅브라더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일탈에 대해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것이며, 힘을 기반으로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펜스 부통령의 발표는 7월 30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상공회의소 주최 ‘인도·태평양 경제포럼’에서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을 진일보시키고 있다. ‘인도·태평양 경제전략 구상’을 넘어 ‘인도·태평양 안보전략 구상’이 출현할 듯하다.
펜스 부통령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을 재정비해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고, 이를 위해 지역 국가들과 파트너십을 강화 하겠다고 선언했다.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우주군을 설립하며, 사이버 전투 능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훗날 사가(史家)들은 펜스 부통령의 이 연설을 미·중 간 새로운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연설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미국 내 대중정책의 스펙트럼은 대중 유화(Appeasement)와 대립(Confrontation) 정향이라는 두 개의 흐름 속에서 그 맥락을 설명할 수 있다. ‘결연(Allignment)’ 정책이나 ‘관여(Engagement)’ 정책은 유화정책의 정향이고, ‘봉쇄(Containment)’ 정책은 대립정책의 정향이다.
양극단에 위치한 이 두 개의 스펙트럼 안에는 봉쇄와 관여를 적절히 결합한 ‘봉쇄·관여(Congagement)’ 정책과 ‘봉쇄·관여 균형(Balancing)’ 정책이 있다. 그리고 관여에 좀 더 방점을 두고 위험 요인을 관리하는 ‘관여적 위험 분산(Hedging)’ 정책이 존재한다. 정책 정향상 전자는 유화와 대립 정책 중간 수준에 가깝고, 후자는 유화 정책에 더 가깝다.
미국의 대중정책은 대체로 이러한 유형의 범주에서 변화를 거듭해왔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 시기에 채택한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은 ‘균형’이란 명칭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관여적 위험 분산’ 정책에 더 가깝다. 즉 중국과의 관계를 본질적인 대립관계로 보기보다는 공존이 가능한 협력적 관계로 만들어간다는 전제하에서 중국의 좀 더 대담한 외교·안보 행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비책을 강구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기존 미국 대중 전략의 진화와 한계
소위 헤징(Hedging)이라고 부르는 기존 대중 전략적 사고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전제가 작동한다. 첫째, 중국의 급속한 부상의 결과 국내 문제가 산적해 있어 중국은 당분간 국내 문제에 치중하고 대외정책의 연속성이 지속될 것이다. 둘째, 중국의 급속한 경제적 부상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며 ‘중진국의 함정’과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이는 중국이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크게 억제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
셋째, 중국은 비록 급속히 군사비를 확장하고 있지만 미·중 간의 군사적 격차는 본질적으로 커서 중국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노골적인 대항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중국이 군사적인 도발을 한다고 할지라도 미국의 군사력은 이를 저지할 충분한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당분간 이러한 우위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중국은 현 국제 체제의 가장 중요한 수혜자 중 하나여서 당분간 현상 유지 세력으로 남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실제 2008, 2009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시진핑 체제에서 드러난 중국의 행태로 말미암아 이들의 전제가 틀렸음이 명백해졌다. 중국은 좀 더 대담하게 자신들의 독자적인 모델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국력을 지닌 국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진핑은 권력을 집중하고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적극 활용하면서 중국의 이익을 확장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군사력 증강과 활용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더군다나 중국의 경제력이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치에 따르면 명목 국내총생산(GDP)기준으로 미국과 중국의 경제 격차가 2018년 6조3000억 달러에서 2023년 2조9000억 달러로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IMF는 미·중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2030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 역량이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을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이제 질적인 측면에서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미국의 대중 전문가나 전략가들은 이러한 중국의 행태에 대한 대안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중정책과 신냉전 시대 도래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이 추진한 대중정책들은 단순히 트럼프 변수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미·중 간의 전략 경쟁과 결부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대중 전문가들을 포함한 미국 사회 전반에서도 트럼프의 정책에 부응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한 지지로 가시화되고 있다.
많은 미국인들은 현재 위축된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의 대중정책들은 새로운 냉전의 시작 혹은 냉전 2.0의 시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기존 유화 위주의 대중 전략을 과감히 버리고, 대립과 충돌의 정향을 채택함으로써 대중 전략의 방향을 변모시켰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미·중 무역분쟁은 미국의 막대한 대중 무역적자를 그 이유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역전쟁을 넘어 양국의 국제질서 주도권을 놓고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서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에는 경제·무역 분야를 넘어서 군사 부문까지 양국이 대립 태세를 보이고 있다. 미·중 간 무역전쟁은 단순한 경제적 분쟁이 아니며, 지속 기간 또한 단기가 아닌 중·장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미·중 전략 경쟁 혹은 신냉전이 심화될수록 한국의 외교·안보 부담은 커질 전망이다. 지정학적으로 해양과 대륙 사이에 끼어 있는 데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 2.0 흐름이 명확해질수록 수출 의존형 노출 국가인 한국은 선택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북한 비핵화 노력에도 상당한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 미국이 대중 유화정책을 펼치던 시기에, 미·중 간 협력의 상징이었던 북핵 문제가 미·중 전략 경쟁의 대상으로 전환될 개연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