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이 처음 등장한 시점은 2006년 11월 18일 한미 정상회담이다. 이 자리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백악관 대변인은 “한국전쟁 종전선언(declaration of the end of the Korean War)”이라고 명명했다. 그러자 국내 언론은 미국이 북한에 종전선언이라는 새로운 유인책을 제시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를 ‘부시의 하노이 선언’이라고 불렀다.
노무현 정부는 이 사안을 주목했다. 종전선언을 평화협정으로 가는 ‘사전 단계’로 상정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로드맵에 넣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선언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나가기로 했다”는 합의가 나오면서 결실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종전선언 추진은 씁쓸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애초부터 미국은 종전선언을 평화협정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 내에서조차 혼선이 거듭됐다. 종전선언을 평화협정의 일부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과 평화협정의 사전 조치로 간주하는 시각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정부 내의 혼선과 한미 간의 이견은 극복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이번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 카드를 꺼냈다. 2018년 3월 남북 특사 교환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북·미 정상회담까지 합의되면서 한반도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종전선언 추진 입장을 밝힌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화답했다. 4월 17일 일본의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서 “그들(남북한)은 (한국전쟁) 종전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나는 이 논의를 축복한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종전’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종전선언 재추진, 하지만…
트럼프가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을 논의키로 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종전 선언 추진은 탄력을 받는 듯했다. 실제로 4·27 판문점 선언에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제 남·북·미 3자, 혹은 남·북·미·중 4자가 모여 종전선언만 하는 일만 남은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이를 위한 좋은 기회로 거론됐다.
그런데 북·미 정상회담 이후 종전선언 추진은 답보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징후는 7월 초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직후 드러났다. 폼페이오는 “선의를 갖고 생산적인 대화를 했다”고 자평했지만, 북한 외무성은 “극히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맞지 않게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아 “종전선언을 발표하는 문제에 대한 미국 측의 답을 기대”했지만,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려는 입장을 취하였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라고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북한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 궁금증은 미국 인터넷 매체 복스(Vox)의 8월 29일자 보도로 풀리게 된다. 이 매체는 복수의 미국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가 6월 1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의 백악관 방문과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을 끝내는 선언에 서명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외무성이 종전선언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더 열의를 보이였던 문제”라고 주장한 것과 맥락이 닿아 있는 보도였다. 하지만 미국은 종전선언은 뒤로 미루고 북한에 선 비핵화를 요구했다. 북한이 폼페이오의 태도에 화가 났던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이처럼 종전선언이 북·미관계의 핵심 문제로 떠오르면서 연합뉴스는 미국 국무부에 7월 13일과 7월 23일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을 연이어 물었다. 그런데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대변인은 동문서답만 내놓았다. 종전선언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북한이 비핵화했을 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평화체제 구축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2007년 10월 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양국 정상회담을 가진 뒤 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양 정상은 한반도 종전선언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8월 27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종전선언을 둘러싼 미국 내부의 이견을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국무부는 종전선언은 한참 뒤에 따라올 평화조약과는 한참 거리가 먼 정치적 조치에 불과하다”며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존볼턴 안보보좌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방관이 현 시기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먼저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및 자산을) 신고하고, 미국이 추가적으로 양보 조치를 취하기 전에 북한의 신고는 검증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볼턴은 “(종전선언과 같은) 어떠한 양보도 북한에 (미국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었고, 매티스는 “종전선언의 함의에 대한 철저한 고려가 없는 상태에서 이 선언이 나오면 한미 양국의 군사적 태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8월 말로 예정됐던 폼페이오의 방북이 취소되기도 했다.
남북 정상들의 답답함 토로
이처럼 미국 내부의 이견으로 종전선언이 답보 상태에 놓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 미국 조야의 의구심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김정은은 9월 초에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정부의 대북 특사단에 “종전선언은 한미동맹의 약화나 주한미군 철수와는 별개”라고 강조했다. 미국 내 일각에서 “북한이 종전선언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를 겨냥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자 미국을 향해 ‘안심하고 종전선언을 하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문 대통령 역시 9월 20일 남북 정상회담 대국민 보고에서 “전쟁을 종식한다는 정치적 선언을 먼저하고 그것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평화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우리가 종전선언을 사용할 때 생각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방북을 통해 김 위원장도 제가 말한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종전선언을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국내외 일각의 우려를 겨냥해서도 “유엔사 지위라든지 주한미군의 주둔 필요성 등에는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9월 25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라 북한이 약속을 어길 경우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 미국으로서는 전혀 손해 보는 일 없다”며 미국의 결단을 거듭 촉구하기도 했다.
그 이후 폼페이오가 방북해 김정은과 면담하면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협상도 다시 본 궤도에 오를지 주목된다. 다만 종전선언에 관한 입장이 좁혀졌는지는 불확실하다. 여러 가지 정황과 보도를 종합해보면, 미국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종전선언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대화를 하고 있다.
미국이 종전선언 주저하는 이유
하나, 북한의 핵 리스트 신고 문제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 신고를 하면 종전선언을 검토해볼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종전선언을 통해 신뢰관계가 구축돼야 핵 신고와 같은 비핵화 조치가 가능하다고 맞선다.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북한이 핵 신고를 해봐야 미국은 이를 믿지 못할 것이고 이 때문에 싸움거리만 생긴다고 여기는 것이다.
둘, 주한미군에 미칠 영향이다. 이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의식해 남북한 정상은 이구동성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미국 주류는 오히려 트럼프의 선택을 걱정하고 있다. 트럼프는 종전선언이 나오기도 전에 심지어 북·미 간의 대결이 첨예했던 지난해에도 주한미군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피력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6·12 북·미 정상회담 직후에도 나온 바 있다.
이에 따라 종전선언이 이뤄지고 이에 힘입어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 본격화되면, 트럼프가 또다시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주한미군의 대폭적인 감축이나 철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김정은보다 트럼프가 더 두려운 존재인 셈이다.
이제 공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 여부와 그 결과로 넘어갔다. 종전선언을 포함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합의’와 단계적이면서도 신속한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 이제야말로 본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