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적으로 남북 군사 합의와 관련해 한국의 속도 조절에 대한 우려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우려는 상당 부분 합의문이 준수되지 않을 가능성과 추가 협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군사 분야 합의가 과거로부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 과거의 합의와 비교할 때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는 점, 향후 한미 간 협의가 필요한 과제를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남북 간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1991년 12월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해 군사적 신뢰 조성과 군축을 실현하는 문제를 협의·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남북 군사공동위원회의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따라 남북 간 불가침을 이행하고 군사적 신뢰 구축과 군축을 위한 협의를 추진했다.
1992년 3월부터 9월까지 군사분과위원회를 개최해 남북 불가침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 합의서를 도출하기도 했다. 2002년 9월과 2003년 1월 각각 동해지구와 서해지구 남북 관리구역 설정과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도로 작업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잠정 합의서가 채택됐다. 2004년 6월 제2차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는 서해 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 활동 중지 및 선전 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해 상호 타협점을 모색하기도 했다.
정전협정 원칙 따라 잠재적 위협 해소
그동안 합의된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들이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북핵 위기 등 안보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 4월 판문점 선언에서 더 이상 남북문제가 외부 변수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반영해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을 상기시켜볼 필요가 있다.
남북이 4월 27일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지대화와 서해 평화수역화 등 군사적 긴장 완화 및 신뢰 구축을 위한 실제적 조치를 취하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번 남북 군사합의서 도출 역시 합의된 바를 추진하는 노력의 연장선에서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이번 합의문에는 그간 군사회담에서 한국이 북측에 제시해온 관심 사항들이 상당히 반영됐다. 2000년 6·15 선언과 2007년 10·4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회담에서 남북이 제시한 의제와 이번에 합의된 내용을 비교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과거 회담에서 한국은 군사 정보 교환, 남북 군사위원회 및 군사실무위원회의 설치, 유해 공동 발굴, 한반도 비핵화 이행 관련 조치들을 제시했던 반면, 북한은 해외로부터의 무력 증강과 외국군과의 합동 군사연습 중지 등을 제시했다.
북한이 관심을 보인 해주 직항로와 제주해협 통과 문제는 추후 협의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선에서 합의됐고, 한미동맹과 관련된 쟁점은 배제됐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한국의 국가이익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을 반영하고, 관련 부처의 의견을 토대로 북한과 수차례 협의를 진행해온 결과물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 제기하는 ‘정전체제 무력화 및 유엔사 무실화 시도’ 우려와는 달리, 이번 합의가 오히려 정전체제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공동 관리와 DMZ의 평화지대화는 정전협정을 준수하는 의미가 있다.
DMZ 내 1km 이내로 근접하는 감시초소(GP)를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km 밖으로 철수하는 조치는 정전협정의 제1조 1항의 규정을 실천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GP 간 우발적 무력 충돌이 80여 차례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잠재적 위협을 해소하는 것은 적대행위 금지라는 정전협정 서문에서 강조한 원칙에 부합한다.
또 JSA의 비무장화 등을 이행할 때 궁극적으로 유엔사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이번 합의서는 남한, 북한, 유엔사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일련의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남북은 DMZ 내 유해 발굴, 역사 유적 공동 조사와 함께 지뢰와 폭발물을 제거하게 되는데, 정전협정 제2조 13항은 DMZ 내 위험물 제거, 유해 발굴·반출, 인원과 장비 통제 등 관련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남북이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DMZ에 대해 배타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는 유엔사와의 조율이 더욱 긴밀해질 수밖에 없다.
10월 2일 육군은 비무장지대 내 6.25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을 강원도 철원군 5사단(열쇠부대) 인근 비무장지대 수색로 일대에서 개시했다. 장병들이 지뢰탐지 및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합의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표현이 포함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과거 협상에서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재설정’하고 NLL의 ‘남쪽’에 평화구역과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자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이 모두 서명한 합의문에서 NLL이 명시됐다는 점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NLL의 실효적 지배 여부와 국제법적 적법성 간 공방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남북이 지속적으로 협의해나가야 할 문제로 보아야 한다.
해상에서의 적대행위 중지는 정전협정 제2조 15항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1999년, 2002년, 2009년, 2010년 서해상에서 발생한 충돌만 해도 총 54명의 전사자를 발생시켰다. 서해 해상 일대에서 평화수역을 설정하는 것은 그간 남북이 소모적 논쟁을 벌여온 이슈이다. 이번에 덕적도에서 초도, 속초에서 통천에 이르는 해상 완충지역에서 포 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하고 해안포와 함포의 포문을 폐쇄하는 조치에 합의한 것은 우발적 충돌 방지를 통한 위기관리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일각에서는 한국군의 군사 대비태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그간 한국의 해상 기동훈련이 덕적도 이남에서 실시됐고, 완충수역 내 북한의 해안선과 해안포를 더 많이 제한하며, NLL 일대에서의 도발을 억제하는 한국의 일상적인 경계작전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남북이 공동 순찰을 통해 사건·사고 발생 시 함께 해결한다는 인도주의 차원뿐만 아니라, 제3국의 불법 조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들 선박을 차단해 어민들의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가져올 경제적 이익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한미 군사 합의 시 다층적 협의 필요
셋째, 향후 남북 군사 분야 합의 이행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한미 간 공감대 형성 및 지속적인 협력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미국 정부는 이번 합의와 관련해 한국과 긴밀히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으나, 여전히 남북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공중에서의 적대행위 중지는 정전협정 제2조 16항에서도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남북이 군사분계선 동·서부 지역 상공에 각각 80km, 40km 폭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은 궁극적으로 공중에서의 우발적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북 정찰·감시 능력이 제한된다는 우려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이 지상 감시 장비, 종합적 영상 정보 등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우월한 입체적 감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고 정찰위성 등을 이용한 중첩 감시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북한의 유일한 정찰 수단인 무인기 활용을 차단하는 효과와 비교할 때, 한국이 얻게 되는 상대적 이득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미국 내 전문가들은 최전방에서의 근접 항공 지원훈련에 제한이 있고, 공군의 정찰 정보 수집이 제한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공중에서의 우발적 충돌은 미국 정치권에서도 우려를 제기해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7년 9월 상원 군사위원회에서는 미 전략폭격기와 전투기가 북한에 근접 비행을 함으로써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질의가 쏟아졌고, 당시 던포드 합참의장은 DMZ 근접 비행이 북한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상태에서 진행됐다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매티스 국방장관은 군사적 수단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외교를 지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수차례 강조해왔다. 이 같은 원칙에 따르자면, 현재 미국과 북한 간에 진행되고 있는 비핵화 협상 여건이 마련되도록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이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양국 간 ‘새로운 관계 성립’과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담은 센토사 합의의 취지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간 한미 국방당국 간 고위급 및 실무 차원의 협의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혼선은 남북합의서가 교환되기 이전에 미국과 모든 채널에서 동일하게 충분한 정보 공유가 이뤄지지 않은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한미 간 군사 분야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좀 더 다층적인 협의가 필요할 것이며, 다음의 사안들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남북 군사 분야 합의에는 정전협정을 제대로 준수하기 위한 방안이 대거 포함된 만큼 미 합참의 통제하에 있는 유엔사와의 사전 협의가 더욱 긴밀해질 것이라는 점, DMZ 내 공동 유해 발굴은 북·미 간 미군 유해 송환과 관련한 합의 이행과 연계된다는 점, 지뢰 제거와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도로 개설 등에 동원되는 장비는 한국의 통제하에 둘 것이므로 미국이 우려하는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은 없다는 점, 한국이 대북 군사 태세에 미치는 영향을 보완하기 위해 고고도 정보 감시 자산 획득을 포함한 방위력 개선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하게 되면 미국이 항상 강조하는 ‘책임 분담’에 기여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한반도 안보 환경의 안정화는 한미동맹이 협력의 외연을 넓혀 미래지향적 파트너십으로 한 차원 도약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불확실성 감소, 투명성 상승… 이해·신뢰 도모
국가별 군사 분야 신뢰 구축을 모니터링하는 유엔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소수의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들이 이행됐으며, 많은 지역에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노력조차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그만큼 군사 분야 신뢰 구축은 쉽지 않은 과제다. 남북 간 군사 분야 합의 이행은 향후 지속될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논의 과정과도 맞물려 있으며, 아직 많은 이슈들이 추후 합의할 내용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군사력 운용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 투명성을 높이는 제반 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호이해와 신뢰를 점차적으로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북이 우선적으로 합의한 시범적 조치를 이행하는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외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남북 간 신뢰 구축 노력이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