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l

국제사회 설득할
논리·비전 제시해야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 게임에서도 강력한 한반도 평화통일 의지는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관련 국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 한반도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남북한이 체결한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 그리고 북·미의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종착지가 어디인지, 남·북·미, 동북아 국가 간 새로운 관계의 비전을 담고 있다.

북한은 핵시설과 핵무기를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이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새로운 북·미관계 정립 등을 목표로 하고 이를 실현키로 했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중·일·러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적극 지지를 표명하고 있고, 남·북·미 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환영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비단 북한 핵무기 폐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어떠한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는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지정학적 이익이 어떠한 변화를 겪는가 등의 문제와 이어진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 폐기를 바라지만, 이로 말미암아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이 침해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1993년 3월 북핵 문제 발발 이후 25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북핵 문제 해결이 요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이익이 엇갈림에 따라 북핵의 현상 유지와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해결 요원한 까닭

현재 북핵 폐기와 남북관계 개선, 새로운 북·미관계 정립을 위한 협상이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북한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기한 데 이어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했다. 미국은 올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폐기 로드맵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밑그림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의 상응조치가 신뢰 구축으로 이어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테지만, 이러한 조치는 그 의미가 평가절하되거나 가역적인 것으로 간주됐고, 나아가 신뢰 부족이란 덫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북·미 협상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경제 분야 교류협력 준비 작업이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지만, 교류협력의 더딘 걸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북한과 한국의 대북관계 개선 속도에 대해 의문을 내비치는 미국이 서로 부딪히면서 한국도 어려움을 겪는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 핵시설 및 핵무기 신고, 미국의 종전선언 실시, 경제 제재 완화 개시 등을 둘러싸고 북·미 양측은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갖는 등가성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북핵 폐기 시간표를 받고 싶어 한다. 북한은 미국의 견고한 대북제재 유지 정책이 완화되는 가시적인 상응 조치를 얻고 싶어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6일(현지시간) 제7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하는 동안 북한 측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미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중국은 비핵화를 추동하는 대북제재의 국제노선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미·중 협력관계에도 각별히 심혈을 기울였다. 10월 12일 중국 관영매체 환추시보(環球時報) 보도에 따르면 리쿠이원(李魁文) 해관총서 대변인은 9월 기준(누적)으로 중국 대북 수출입액이 111억1000만 위안(1조8207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2%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대북 수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40.8% 감소한 101억1000만 위안(1조6568억 원), 대북 수입액이 90.1% 급감한 10억 위안(1638억 원)이다. 중국의 대북제재 참여는 김정은 위원장으로 하여금 북한이 핵 개발을 지속할 경우 경제에 큰 타격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하게 한 결정적인 배경 중 하나였다.

중국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와 함께 중국식 개혁·개방 모델을 따를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은 미·중 간 경쟁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긴밀한 북·중관계를 통해 중·장기적인 국가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북한 약화 혹은 대남 열세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다방면에서 노력할 것이다. 이를테면 대북제재를 가하면서도 미국을 향해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를 요구하거나 러시아와 함께 미국에 상응 조치를 요구하는 식이다.

동북아 구도 변화에 민감한 러시아와 북한, 중국은 10월 9일 북·중·러 3자 외무차관 회담 이후 “3자는 북한이 의미 있는 실천적 비핵화 조치를 취한 점을 주목하면서 유엔 안보리가 제때 대북제재의 조절 과정을 가동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견해 일치를 보았다”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아가 중국이 북한 경제가 붕괴되지 않도록 북·중 국경에서 벌어지는 밀무역을 용인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받는다.

美·中 경제 갈등, 비핵화 걸림돌 될 수도

현재 진행되는 미·중 간 경제 갈등도 북한 비핵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관세 부과 조치를 두 차례 시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대중 무역정책이 전반적인 중·장기 대중 견제전략의 일환으로 귀결될지, 미·중관계가 재조정됨에 따라 상호 협력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려면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주요 품목 수입 및 미국 기업의 중국 진출 면에서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미·중은 상호 취약성을 가진 관계인 셈이다.

10월 4일(현지시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에서 마련한 연설에서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과 기술 불법 취득, 인권 탄압 등에 관해 전방위적으로 비판한 후 중국의 대미 불만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미 협력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다. 북한의 비핵화는 미국 안보의 문제이므로 중국을 비난하는 미국의 북핵 문제를 왜 도와야 하는지 반문하는 중국 내 여론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협상 태도를 놓고 ‘중국 배후론’을 수차례 제기한 상황에서 중국의 이러한 분위기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의구심을 증폭시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 역시 북한 비핵화 조치의 목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만, 향후 북한을 둘러싼 외교관계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중국, 미국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정상회담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입지가 축소될까 봐 우려하고 있다. 일본 입장에서 핵심 이익인 납치자 문제가 협상 과정에서 누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폐기되더라도 일본 본토를 위협하는 중거리 미사일이 잔존한다면 일본의 안보 우려는 지속될 수 있다. 군대를 보유하고 대외 무력 행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 아베 정부로서는 북핵 문제 해결 과정이 일본의 개헌 찬반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전략 역시 국내 정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처음 대면한 트럼프 대통령의 왼팔을 잡고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10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북·중·러 3자 외무차관급 회담에 참석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회담 결과에 대한 질문에 “잘됐다”고 짧게 대답했다.

일본은 “북한의 대량파괴무기와 모든 사거리의 탄도미사일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이행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은 북·일 정상회담을 추구하면서 대북관계 정상화에도 대비하고 있다. 4월 29일 진행된 니혼게이자이신문 여론 조사와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각각 응답자의 75%와 응답자의 67%가 북·일 정상회담 조기 개최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북한과 일본이 7월 15일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비밀회담’을 했다고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터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에서는 정보기관인 내각정보조사실의 수장인 기타무라 시게루 내각 정보관, 북한에서는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이 각각 참석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전체적으로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면서 식민지 배상을 고려해 대일관계 정상화에도 힘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처음 대면한 트럼프 대통령의 왼팔을 잡고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중국 대표로 회의장에 있던 왕이 외교부장은 순간 표정이 굳었다.

향후 북핵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북·미 간 협상이라는 미시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가 실현될 경우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구도 변화라는 거시적 측면이 배후로 작용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반도 주변국은 자국의 지정학 이해 변화 속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국에 불리하거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북핵 문제 해결을 추구하기보다 북핵 문제가 장기화되도록 방치하거나 해결되지 못한 채 현상 유지되는 것을 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반도 비핵화 위한 논리 개발해야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따른 지정학 측면에서 입장이 가장 불분명한 국가는 미국이다. 트럼프 정부는 자국의 경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공정무역 요구를 넘어선 동아시아 전략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 관한 구상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목적과 실행 방법이 뚜렷하지 않아 동아시아 전략 구도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미관계 개선 이후 양자 관계가 어디로 나아갈지 미국의 계산이 명확하지 않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제한된 비전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비핵화를 선언한 북한과 어떤 전략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미국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계산한다면 비핵화 협상이 수월해질 것이고 북·미 간 신뢰 구축도 가능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처음 대면한 트럼프 대통령의 왼팔을 잡고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다.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주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11월(미국) 중간선거에 개입하려 시도했다”며 “(이는) 무역 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도전한 첫 대통령인 내가 선거에서 이기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평화로운 한반도가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 이익에 부합하고, 이를 통해 미·중관계 기조가 경쟁에서 협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를 개발해 제시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이 동아시아가 협력함으로써 신질서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면, 한국 외교의 입지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전 재 성 전 재 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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