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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남북관계의 明暗,
빛을 위해 그늘 살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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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영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남북관계가 개선 또는 악화됐다는 말은 매우 자의적으로 쓰이고 있어 정확히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돼버린 것 같다. 예를 들어 남북한 정상회담 등 이벤트가 개최되거나 이를 위한 사전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만 들려도 남북관계가 해빙(解氷)됐다고 자축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남한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북한과 대화하면 평화통일이 올 것이라 낙관한다.

반면 진정한 남북관계의 개선은 북한의 핵 폐기, 개혁·개방 등 북한의 정상국가 이행이 전제돼야 한다는 이른바 ‘원칙론’이 이에 맞서고 있다. 이들은 분단 이래 수시로 협약 파기와 무력도발을 일삼아온 북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강조하면서 일회성 이벤트의 유무에 남한 사회가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의 진정성을 기다리는 것 역시 북한을 상대하는 중요한 카드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상이한 두 시각은 나아가 남북관계의 현실 진단과 전망에 대한 시각차로 이어져 소위 남남갈등의 단초가 되고 있다. 따라서 남북관계 명암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아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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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1차 남북 정상회담(2000년 6월 13~15일).

희망과 좌절 교차해온 남북관계

분단 이래 남북관계는 북한이 평화적 제스처와 도발을 반복해오면서 희망과 좌절이 교차해왔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사건을 일으킨 지 4년 만인 1972년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을 통해 서로를 비방하지 않고 무력도발을 하지 않기로 약속해 남북 화해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의 유신정권을 이유로 1년 만에 성명을 사문화시키고 연이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KAL기 테러 등을 잇따라 감행하면서 책임을 남한에 전가해 남북관계를 불신으로 점철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인내심을 갖고 북한과 대화하려 노력했다. 일례로 1988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이른바 ‘7·7 선언’을 통해 남북한이 함께 번영을 이루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자는 제안을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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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바리케이트로 막힌 통일대교 입구.

이후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하던 1990년, 북한은 김일성의 신년사를 통해 남북 최고위급 회담을 제안해 또 한 차례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는 게 아니냐는 기대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듬해인 1991년 12월 13일에 발표된 ‘남북 기본합의서’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북한은 20여 년 전 ‘7·4 공동선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합의서에도 상호 체제 인정과 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를 약속했다. 약 1년 뒤인 1993년 3월 9일,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 역시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지속하고 확대하고자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전격 송환할 것을 약속해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 기조가 가시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은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을 저질렀다. 그뿐이 아니었다. 강릉 잠수함 침투가 있기 두 달 전인 1996년 7월 21일에는 당시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무하마드 깐수가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그리고 1999년 1차 연평해전이 있은 지 약 4개월 뒤인 10월 1일 평양의 위조지폐 공장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온 최덕근 러시아 영사가 살해된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북한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만년필 독침’이 검출돼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다.

2000년 김대중 정부의 극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다시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됐다. 그해 6월 13일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위원장이 예정에 없이 평양 순안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와 두 손을 맞잡는 장면이 TV에 생중계되고, 이틀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하자 남한 국민들은 또 한 번 환호했다. 그러나 새천년이 왔음에도 북한의 지속되는 무력도발로 많은 군 장병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북한은 2000과 2007년 두 번의 정상회담, 그리고 그 사이 21회에 걸친 남북 장관급회담을 통해 계속해서 평화를 약속해왔지만 2002년 월드컵 폐막식이 있던 6월 29일의 2차 연평해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저격,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 또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차에 걸친 6자회담에 나오는 동안에도 2006년 핵실험을 단행했으며, 2009년과 2013년에도 2,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일련의 군사도발을 전후한 간첩사건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6년 ‘일심회’ 사건, 2008년 여간첩 원정화 사건, 2010년 황장엽 암살기도 사건을 비롯해 최근 2013년 10월 현재 재판 중인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혁명조직(RO)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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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단에 위치한 SK어패럴 근로자들.

명암(明暗)을 보는 바른 시각

빛과 그늘, 그리고 희망과 좌절이 교차되어온 남북관계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사회에는 북한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하게 되었다. 먼저 ‘그늘’을 주목하는 이들은 북한과의 약속이나 대화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전제하에 상호주의, 원칙 있는 협상, 굳건한 안보를 강조한다. 한편 상대적으로 ‘빛’을 주목하는 이들은 대체로 북한과의 대화와 협약이 실효가 있다는 전제하에 이를 위해 인내심을 갖고 양보하자는 입장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시각은 근본적으로 북한 정권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가정을 하고 있어서 종종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해서도 엇갈린 해석을 내놓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쪽을 주목하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금의 북한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상대로 보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굳이 북한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공산국가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공산 진영의 핵심 인사도 인정한 바 있다. 1992년 6월 17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대화 상대가 누구이건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그들이 자유 진영 국가들을 상대로 기만을 일삼아왔음을 역으로 인정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과거 동독 역시 노련한 기만전술을 구사했다. 1972년 동독은 ‘교통에 관한 협약’을 통해 동서독 간에 좀 더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상호 무력을 포기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974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의 수석비서였던 귄터 기욤이 동독이 보낸 간첩이었음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기욤은 빌리 브란트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각종 비밀문서를 자유롭게 열람했으며, 심지어 총리의 개인 휴가에도 동행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통일 후 공개된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동독은 붕괴 직전까지 서독에 2만여 명의 간첩을 암약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연방검찰은 그중 핵심인물 약 3000명을 선별해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북한의 협상전략을 연구한 해외 전문가들도 북의 거짓말에 유의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미 의회와 국방부에서 활동했던 척 다운스는 1999년에 저서 <벼랑끝 전술(Over The Line)>을 통해 북한이 지난날 국제사회에 보여준 협상전략을 ▲ 상대에게 대화해주는 대가를 반드시 요구하며 ▲ 협상 상대를 지치게 하기 위해 이미 합의된 사항을 수시로 뒤집고 ▲ 상대의 관심을 돌릴 만한 외부 도발을 일으켜 책임을 전가하는 것 등으로 요약했다. 1951년부터 2년간 6·25 휴전협상의 유엔군 측 수석대표로 활약했던 터너 조이 해군 제독 역시 잘 알려진 북한 전문가로, 북한과의 지난한 협상 과정을 경험한 뒤 1956년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위에 소개한 분단 이후 북한의 악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 ▲공산주의자들이 대화를 제의해도 군사적 압박을 늦추지 말 것 ▲ 실질적 진전이 없을 시 단호히 대화를 중단할 것 ▲ 협상 전에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그 원칙을 사수할 것 등을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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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월21일 이산가족 상봉행사 연기 발표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서울 중구 적십자사를 찾은 조장금(81) 할머니가 안타까운 소식에 눈물을 훔치고 있다.

빛을 위해 그늘 살펴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한이 무력도발과 유화적 공세를 병행하는 이유는 대내외적 여건에 따라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1972년 미국과 중국이 우호관계로 선회하자 고립을 우려해 7·4 공동성명이라는 유화적 카드를 꺼냈으며, 구 소련의 패망을 보고 즉각 남한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2000년 이후에는 주로 경제 원조를 받고 한편으로 남한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기 위해 수시로 대화와 도발을 반복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한을 상대하는 데 있어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먼저 남북협력과 교류는 북한을 좀 더 안전한 국가로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통일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특히 북한에 대한 경제 원조 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정부와 국민들이 북한과의 정상회담, 공동선언 등 일회성 이벤트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북한과 달리 국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특성상 국민들이 가시적 성과에 조급해하면 정부가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펼치기 어렵다. 또한 역대 정권들이 이러한 이벤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종종 도발을 하는 북한에 상을 준 것이 오늘날 남북대화를 어렵게 만든 주된 요인이 되고 있음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셋째, 그 어떤 정책보다 튼튼한 안보와 자유·평화통일을 향한 국민 의지의 결집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북한을 민족·동포애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낙관하기보다 통일로 가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 그리고 언젠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남북관계에서 안이함과 근거 없는 낙관은 재앙을 부를 수 있으며, 언제 있을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며 차분히 나아가는 자세만이 지속 가능한 평화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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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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