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폭발한 직후의 모습.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폭발한 직후의 모습.

지금도 계속되는 피폭자의 절규
북핵 본질 외면하면 우리 문제 될 수도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었지만 2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도 두 도시엔 한동안 잿빛 암울함과 죽음의 그림자만 가득했다. 북핵은 언제든 우리 대한민국을 또다시 히로시마, 나가사키로 만들 수 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1945년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일주일이 채 안 돼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B-29 폭격기가 원자폭탄을 투하한 두 도시는 생지옥의 시작이었다. 그해 말까지 두 도시에서는 최대 16만6000명과 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열도 각지에서는 재건과 부흥의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잿빛 암울함과 죽음의 그림자만 가득했다. 방사능 피해는 육체적 상처로도, 사회적 차별로도 후손에게까지 이어져 살아 있음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경제대국 일본은 자국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과 동맹국이 되었다.

핵무기는 인류가 만든 최강의 그리고 최악의 무기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5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일본의 사망자는 약 310만 명을 헤아리는데, 두 발의 원자폭탄 희생자가 전체의 8%에 육박한다. 히로시마 600m 상공에서 작렬한 우라늄 원폭 ‘리틀 보이(Little Boy)’는 그라운드 제로, 즉 폭심지(爆心地) 500m 이내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했고, 1㎞ 이내에서도 90%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흘 후 기상 악화로 고쿠라(小倉, 규슈 북부) 대신 선택된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 원폭 ‘팻 맨(Fat Man)’의 불벼락이 덮쳤다. 위력은 더 강했지만 히로시마에 비해 언덕이 많은 지형 탓에 희생자가 다소 줄었다. 비인도적인 대량살상무기, 이것이 원폭을 정의하는 가장 짤막한 표현일 것이다.

원폭을 보는 두 가지 시각

미국의 원폭 투하는 과연 옳았을까?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 동안 제기된 물음인데도 종착역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그 점을 조금 더 파고들어가 보자.

원폭이 투하되자마자 미국과 일본은 서로 상충되는 견해를 발표했다. 투하 당일 미국은 “이 무익한 전쟁을 장기화하는 군사상의 모든 것을 이 무서운 원자폭탄으로 파괴한다”는 유인물을 일본 전역에 공중 살포했다. 전쟁 종결을 앞당기는 수단이라는 함의였다. 일본 정부는 8월 10일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미국이 “무차별성, 잔학성을 지닌 폭탄을 사용한 것은 인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죄악”이라면서 “전 인류 및 문명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를 규탄함과 동시에 즉시 그런 비인도적 무기의 사용을 포기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고 부르짖었다.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혹은 민간인을 포함한 비인도적인 대량 살상. 원폭을 둘러싼 시비는 두 명제 중 어느 쪽을 중시할 것인가로 압축된다.

전자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로 제시된 것은 원폭 투하 대신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수행했다면 미군 사상자만 100만 명을 넘었을 것이라는 추계였다. 그만큼 인명 손실을 줄이고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는 논리이며,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논거 또한 녹록지 않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은 소이탄을 사용한 통상적인 폭격이었는데도 사망자만 10만 명을 넘었다. B-29의 전략 폭격 능력만으로도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핵폭탄 폭발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내 전경. 핵폭탄 폭발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내 전경.

원폭 투하를 비판하는 논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됐다. 하나는 피해의 참상이 밝혀지고 냉전에 따른 핵전쟁 위협이 현실화하면서 태동했다. ‘노 모어 히로시마(No more Hiroshimas)’는 반핵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미국의 원폭 투하는 비인도적인 조치였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전후 구상과 관련된다. 미국은 얄타협정에 의해 대일전 참전이 예정된 구소련을 견제하는 한편, 전후 국제사회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노려 원폭 투하로 전쟁을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1955년 4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자 5명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과 더불어 미국의 원폭 투하는 국제법 위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당시는 피폭자에 대한 아무런 구호 조치가 없던 시기였다. 8년이 지난 1963년 12월 내려진 결론은 ‘배상 청구 기각’과 ‘미군에 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국제법 위반’이었다.

전자는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 정부가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 데서 기인하며, 국제법 위반의 결정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가해국 안의 피해자가 감수해야 했던 가혹한 현실의 한 단면이다.

한국은 엄연한 제2의 피폭국

소송 제기에 자극을 받은 듯 일본 정부는 서둘러 피폭자 원호에 나섰다. 1957년 의료 지원이, 1968년 의료특별수당 지급이 이뤄졌고, 1995년 양자를 합친 피폭자원호법이 제정되었다.

그렇지만 제반 조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가 부재한 인도적인 ‘시혜’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 일본 후생성은 원폭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했는데, 거기에는 “국가의 존속이 걸린 전쟁하에서는 국민이 그 생명, 신체, 재산 등에 관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국적인 전쟁에 의한 ‘일반적 희생’으로서 모든 국민들이 골고루 수인(受忍, 어떤 혜택에 파생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법률 용어)해야 하는바”라고 명시돼 있었다. 가해자 없는 모호한 피해 의식, 보통의 일본인은 그런 뒤틀림 속에서 전쟁 책임에 대한 인식을 키워왔다.

원폭 피해자는 일본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과 미군 포로까지 포함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한국인 거주자 7만 명 중 4만 명이 사망했고, 생존자 중 2만3000명이 귀국했다고 추정된다. 2016년 말 2500명의 피폭자가 생존하는 한국은 엄연한 제2의 피폭국이다.

한국인 피폭자에게 8월 15일은 해방이 아니었다. 소설가 김옥숙은 <흉터의 꽃>에서 이렇게 썼다. “해방된 조국에서는 동포들이 해방의 감격에 취해서 거리로 뛰쳐나와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있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지옥의 한가운데를 헤매고 있었다. 생지옥이었다”라고. 첫 실태 조사가 이뤄진 것은 20년이나 지난 1964년. 이후 단체가 결성되고 피해 배상의 목소리가 일긴 했으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법적인 해결의 길은 봉쇄되고 말았다. 한국인 피폭자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조차 버림받은 존재였다.

2015년 9월 8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외국에 사는 원폭 피해자의 치료비를 일본 정부가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직후 이 소송을 지원한 일본 시민단체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과 변호인단이 도쿄 가스미가세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5년 9월 8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외국에 사는 원폭 피해자의 치료비를 일본 정부가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직후 이 소송을 지원한 일본 시민단체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과 변호인단이 도쿄 가스미가세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위에 언급한 일본의 피폭자 혜택은 일본 거주자에 국한됐다. 급기야 1970년 손진두 씨는 밀항을 선택했고, 긴 법적 투쟁 끝에 1978년 승소했다. 1995년 피폭자원호법 역시 한국 거주 피해자를 배제했고, 잇단 소송에 패소한 뒤에야 일본은 의료비 지원을 개방했다. 2016년 한국을 찾은 전 히로시마 시장은 “일본 정부는 패전 이후 평화를 외치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없었다”며 “한국인 피폭자들의 존재는 일본의 그런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일침을 놓았다.

광복 이후 한국은 가해국 일본을 질타해왔지만, 정작 우리 피해자의 절절한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원폭 피해자 구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몫이었다. 실태 조사를 포함한 지원 사업을 담은 이른바 ‘원폭 피해자 지원 특별법’은 두 차례나 폐기된 끝에 2016년 5월에야 제정됐다. 피폭 71년 만의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인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에 한국인 스스로가 낯설어한다. 현행 중·고교 역사교과서는 하나같이 원폭 투하를 기술했지만, 한국인 피폭자를 언급한 교과서는 딱 1종밖에 없다.

21세기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피폭은 위험한 ‘현재’

21세기의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피폭은 더 이상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연원한 ‘과거’가 아니다. 내일이라도 닥칠지 모를 위험한 ‘현재’이다. 바로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핵무기 때문이다.

2016년 5월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북핵을 연결하는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그의 명연설은 큰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유일한 원폭 사용국의 대통령은 끝내 한마디의 사과도 내놓지 않았고, 한국인 위령탑을 찾지도 않았다. 일본 정부는 ‘아베 외교의 승리’를 자축했고, 한국과 중국의 매스컴은 일본의 우경화에 면죄부를 줄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놓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여전히 미해결이라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아울러 21세기에 들어서서도 핵무기 철폐라는 이상과 핵 억지력에 의존하는 현실 간의 괴리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북한은 그런 과거와 현재의 딜레마를 악용이나 하듯 핵이라는 파멸적 카드를 꺼내들었다.

북한이 7월 4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한 탄도미사일 화성-14형 발사 장면.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7월 4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한 탄도미사일 화성-14형 발사 장면.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피폭자의 고통을 전하려 했던 김옥숙 씨는 우리 내부의 핵 불감증에 대해 경고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원전의 안전 문제를 거론하면서 “핵이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무심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번득이는 혜안은 통일 독일의 첫 대통령을 지낸 바이츠제커의 경구, 즉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맹목적이 된다”와 겹쳐진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외면하면 북핵의 본질도 꿰뚫어볼 수 없다.

핵무기에는 칼자루가 없고 칼날만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무엇보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선택이라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이것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의 절규이자 교훈이다.

photo 하 종 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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