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의 하나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취임 첫날부터 문 대통령은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시작으로 주요국 정상들과 전화 외교를 가졌고, 뒤이어 대통령 특사단 파견, 한미 정상회담과 독일 함부르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통해 한국 외교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외교관계 정상화에 큰 공을 들인 것은 지난해 12월 9일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정 이후 5개월 동안 국가 리더십이 공백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백기 동안 북한은 각종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에 대응해 미국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잇따라 한국을 방문하고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급파하는 등으로 북한의 오판을 막고자 했다.
4월 초 미·중 정상이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고,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발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 리더십이 부재했고 대통령 선거기간 중이어서 우리 정부가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내적으로 코리아 패싱과 한반도 전쟁에 대한 우려가 급격히 고조되기도 했다.
사드 딜레마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이처럼 엄중한 정세 속에서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최대 외교 과제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수위를 낮추는 것이었다. 첫 조치가 취임 후 51일 만에 가진 한미 정상회담 개최였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동맹 강화와 대북정책 공조에 합의했고, 공정한 무역을 비롯한 경제 협력과 글로벌 파트너십 강화에도 뜻을 모았다.
7월 6, 7일 열린 G20 함부르크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9개국 정상들과 한·미·일 정상, 그리고 3개 국제기구 수장들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는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 우의를 다졌다. 눈길을 끌었던 한중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사드 문제나 군대 위안부 문제와 같은 민감한 양국 현안을 피한 채 새롭게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보다 주목을 받았다. 그 배경에는 중견국가로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평화적인 촛불시위가 만들어낸 탄핵 정국 속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문 대통령에 대한 깊은 관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정상회담과 G20 정상회의에서 확보한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딜레마를 극복하고, 일본과의 군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엄중한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외교적 갈등은 아직 진행 중인 과제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사드 문제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으나, 집권 이후 배치 수용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6월 9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환경영향평가는 실시하되 한미동맹 차원의 약속은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고, 6월 26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동맹의 결정을 번복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4강외교를 넘어 아세안, 유럽 등으로 외교 지평을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메르켈 독일 총리와 인사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
하지만 중국은 사드 배치가 동북아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깨는 조치라며 강하게 반발해왔으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경제 보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중국은 G20 정상회의를 이틀 앞둔 7월 4일 중러 정상회담을 갖고 남한 내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G20 정상회의 중인 7월 6일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시 주석은 문 대통령에게 사드 배치 결정의 철회를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사드 딜레마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 주석의 편향된 한반도 발언이 한중관계의 악화에 한몫하고 있다. 시 주석은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가 옛날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했고,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북중관계가 혈맹이라고 밝히는 등 부적절한 발언을 이어갔다. 이처럼 사드 문제를 둘러싼 중국의 보복 조치와 망언은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 공조뿐 아니라 정상적인 양국관계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일 양국 사이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박근혜 정부가 졸속 체결한 군대 위안부 합의는 일본 정부 예산을 위안부 지원재단에 출연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는 성과가 없진 않다. 그럼에도 보편적 인권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합의문에 ‘최종적이고 비가역적인 해결’이라는 비외교적인 문구 등 우리 국민의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에 외교적 역량 집중해야
지금 우리 정부는 군대 위안부 문제와 양국 간 현안을 분리한다는 투트랙 외교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미·일 공조에는 응하면서도, 적반하장 격으로 군대 위안부 합의의 수용을 고집하며 한일 통화스와프 연장 협의에 응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파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아 양국관계에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러시아는 지금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지만, 한국과의 협력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러시아 측은 북한 변수로 막혀 있는 남·북·러 3각 협력을 넘어 한국과 러시아 간의 직접 협력을 통해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길 바라고 있다. 한국도 에너지 분야 협력뿐만 아니라 미·중 딜레마에서 자유롭고 북한 핵문제에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 발전에 주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앞선 정부가 빚어낸 외교 참사들을 뒤처리하느라 출범 초기부터 바쁘게 움직여왔다. 정상외교를 통해 외교관계의 안정화가 어느 정도 실현된 만큼 이제부터 우리 정부는 미국과 중국 대국들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는 딜레마 상황에서 벗어나면서 북한 핵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데 외교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커지면서 주한미군의 사드 도입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여기서 우리의 외교적 딜레마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외교적 딜레마가 북한 핵문제와 직결돼 있는 만큼,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일방을 선택하거나 균형을 취하기보다 한반도의 긴장 수위를 낮춰 북한 핵문제의 진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G20 정상회의 성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북핵 출구론의 입장에서 남북관계 정상화 집중해야
우리 정부가 직접 주도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반도 긴장 완화를 통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간) 발표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Leading Role)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정부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발휘하려면 북한 핵문제의 접근에 대한 기본 입장부터 정해야 한다. 앞선 정부들이 북핵 입구론의 입장에 서면서 헛되이 시간만 보낸 만큼 북핵 출구론의 입장에서 남북관계의 정상화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 수위를 낮추면서 최종적으로 비핵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 속에서 문 대통령은 7월 6일 신한반도 평화 비전을 담은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7월 17일에는 베를린 구상의 후속 조치로 남북 적십자회담과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은 베를린 구상에 아랑곳 않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을 뿐 아니라 군사회담 제안에도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7월 27일 전승절이 지나서도 북측이 우리 측 대화 제의에 반응해오지 않는다면, 8·15 경축사를 통해 남북 최고지도자의 뜻을 나눌 수 있는 특사 교환과 같은 특단의 조치를 제안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단 고위급 접촉이 이뤄진다면,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군사적 긴장 완화 방안에 대해 협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이제 우리 외교는 갈림길에 서 있다. 남북대화로 긴장 완화 방안이 마련된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 딜레마도 해소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반면 북한이 끝까지 대화 제의를 무시한 채 추가 도발을 자행한다면 상당 기간 냉각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제 공은 우리의 손을 떠나 북한에 넘어가 있다. 공존이냐 자멸이냐, 선택은 오로지 북한의 몫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