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IN

맛이 연하고 깨끗하며 거품성이 좋은 대동강 1번 맥주는 북한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위). 북한에선 캔맥주를 ‘떼기식 통맥주’라고 부른다. 대동강 떼기식 통맥주는 2017년부터 생산됐다. 북한 개성시 자님산여관 인근 거리를 걷고 있는 개성 주민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개성
그리고 개성 사람

6·25전쟁이 발발한 그해 겨울, 개성 집에서 부리는 머슴의 등에 업혀 월남했다는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할머니는 개성에 위치한 호수돈여고를 다녔다고 했다. 소설가 최인훈의 소설 ‘상도’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다녕과 흡사한 자태를 지닌 할머니가 인상적이었다. 이 할머니와의 만남은 자연스레 개성에 대한 추억으로 남게 됐다.

그로부터 한참 후, 실제 개성 지역을 방문해 개성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개성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한겨울 새벽 추위를 가르고 출발한 버스는 출국과 입국이 아닌 ‘입경과 출경’ 심사를 거쳐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개성 시내에 도착했다.

개성 관광은 금강산 관광과는 다르다. 관광하는 내내 주민들이 사는 구역을 통과했고, 자연스럽게 도시와 그곳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반대로 우리가 그들로 부터 관찰당하기도 했다.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 눈을 반짝이며 쳐다볼 땐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지조차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이곳 도시와 사람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바로 개성과 개성 사람들이었다.

2002년 개성공단 등장 전까지 남한에서 존재감이 약했던 개성. 그 개성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개성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남한에 포함됐다가 전란 중에 북으로 편입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38선이 그어질 때까지만 해도 남한에 포함돼 있던 개성은 6·25전쟁 중에 북한으로 편입됐다. 한반도 중간 길목에 위치한 개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때 반드시 거치는 도시다. 6·25전쟁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개성 송악산을 따라 38선이 획정되면서 개성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대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개성은 6·25전쟁 발발 5시간 만에 북한에 점령당했다. 갑작스러운 개전으로 개성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피할 새도 없이 북에서 내려오는 탱크를 보고 전쟁이 터진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전쟁은 직접적으로, 폭력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마을 공동체가 파괴됐다. 개성 사람들은 이곳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개성에 남아 지내려면 이 지역을다스리는 북한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개성은 상업자본과 인삼 재배사업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상인집단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 개성 사람들로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북한 정권이 못내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기반이 갖춰져 있는 고향을 떠나는 것도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떠난다는 건 결국 낯선 지역에 정착해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들로서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는 셈이었다.

맛이 연하고 깨끗하며 거품성이 좋은 대동강 1번 맥주는 북한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위). 북한에선 캔맥주를 ‘떼기식 통맥주’라고 부른다. 대동강 떼기식 통맥주는 2017년부터 생산됐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이 퇴근을 하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 있던 많은 개성 지역 유지들이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며 월남을 결심했다. 일부는 개성에 남기로 했다. 훗날 이들은 북한 당국과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회주의 협동화 운동이 본격화되던 1950년대 말에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만다. 북한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혹은 교전이나 징집, 유학, 장사 문제로 일부 가족을 남한으로 보낸 월남자 가족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야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월남한 가족을 통해 간첩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 때문에 북한의 통제와 감시하에서 살아야 했다. 결국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전후 복구사업과 사회 통합을 위해 월남자 가족을 대상으로 포섭정책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최근까지도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주민 교체사업 대상자가 돼 강제로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시대 변화 받아들이고 독립적인 이익 창출

월남자 가족을 두지 않은 개성 사람들이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북한의 신해방지구 정책을 따라야 했다. 신해방지구 정책은 북한이 개성과 옹진 등 6·25전쟁을 통해 편입한 지역을 사회주의적 지방으로 새롭게 만드는 정책이다. 이 정책에 점차 동화된 사람들은 북한 주민으로, 사회주의 인민으로 재탄생했다.

월남한 개성 사람들은 다행히 높은 교육 수준, 남한 사회의 인맥, 전문적인 상업 지식을 갖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 내려온 월남민보다 수월하게 남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향과 가까운 서울과 경기, 인천 등지에 월남할 때 가지고 내려온 인삼 씨앗과 묘목을 심었고, 그 결과 개성 인삼이 남한 사회에 확산됐다. 특히 일부 개성 사람들은 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1960년대 남한 경제부흥기에 개성 출신 사업가들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개성 상인은 독립적이고 혁신적인 경영 전략을 추구한다는 평가와 함께 21세기 시대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맛이 연하고 깨끗하며 거품성이 좋은 대동강 1번 맥주는 북한에서 인기가 가장 높다(위). 북한에선 캔맥주를 ‘떼기식 통맥주’라고 부른다. 대동강 떼기식 통맥주는 2017년부터 생산됐다. 2013년 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바라본 개성공단의 모습.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개성은 평양 다음으로 잘 알려진 북한의 지방 도시가 됐다. 개성은 곧 ‘개성 공단’을 의미했고, 개성 사람들은 개성공단 노동자가 되어 통일 한국의 경제·생활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개성은 고려시대 수도(개경)였으며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까지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독립적인 이익을 창출한 지역이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변화가 예정된 지금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발현될지 기대된다.

박 경 석 박 소 영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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