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이곳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도시의 이름이자 자신의 유골을 묻어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 이 공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47번째 역사·통일골든벨 문제. 최후의 1인으로 남은 최용희 군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한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가던 최 군에게 찾아온 첫 번째 위기의 순간이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갑자기 밝아진 표정으로 답을 적어나가는 최 군.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화이트보드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정답 ‘하얼빈’이 적혀 있었다.
47번 문항은 하와이 어학연수의 기회가 걸려 있는 글로벌 코리아 인재 육성 문제로, 민주평통 김덕룡 수석부의장이 직접 출제에 나서 그 의미를 더했다. 김 부의장은 정답을 맞힌 최 군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한편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청소년들이 정말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는 말로 함께한 청소년들을 격려했다. 또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자산”이라면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해서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슬프고 불행했던 역사도 있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다. 이 모든 순간들을 잘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우리 대한민국의 빛나는 미래를 펼쳐 나갔으면 한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통일 기원하며 실력 겨룬 국내외 고교생 100명
국내외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통일 공감 사업의 일환인 역사·통일골든벨 프로그램은 매년 여름, KBS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의 특집 편으로 진행돼왔다. 도전 골든벨은 100명의 패기 넘치는 청소년들이 50문제에 도전해 단 한 명이라도 50개의 문제를 모두 맞힐 경우 골든벨을 울리는 퀴즈 프로그램. 골든벨을 울린 학생의 이름은 명예의 전당에 새겨지게 된다. 올해 2018 청소년 통일골든벨에는 국내외 234개 협의회 12만 2785명의 학생이 참가해 그 뜨거운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 출제된 문제는 평화·통일·역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문제출제위원회가 청소년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평화와 통일 및 근·현대사 분야에서 고르게 선별했다. 문제의 유형은 단답형부터 4지선다형, OX형 등으로 다양하게 난이도를 배분했으며, 기존의 단순암기형이나 지엽적인 형태의 문제는 최대한 배제했다. 또한 평화 관련 문항을 개발하고 통일과 북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문제를 보강하는 등 주제와 문제 선별에 균형과 객관성을 보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결선에 진출한 국내외 100명의 참가자들은 이번 종합결선대회를 거쳐 최후의 1인 자리를 놓고 실력을 겨뤘다.
지난해까지 290개이던 기본학습문제 공개 문항도 970개로 늘렸다. 공개문항은 민주평통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블로그, 모바일 앱 등 청소년들이 접근하기 쉬운 매체에 사전 공개해 청소년들의 관심과 참여를 독려했다. 국내 청소년들에 비해 역사나 통일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해외 거주 청소년들을 위해 영어번역본을 사전 배포해 접근성을 높이는 등 해외 거주 청소년들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참가자 각자의 다양한 생각을 묻는 문제도 주어졌다. 과거 역사 속으로 돌아가 만나고픈 인물 또는 바꾸고 싶은 사건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청소년들은 단군 왕검부터 윤동주 시인, 세종대왕 등 대한민국의 역사를 빛내온 위인부터 이완용, 의자왕 등 역사를 뒤흔든 세기의 이름들을 쏟아냈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날로 돌아가고 싶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막고 싶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고구려의 삼국통일로 바꾸고 싶다’는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쏟아졌다. 물론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청소년들의 다양한 생각과 재치 있는 답변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으로, 해당 문제에 대해서는 전원 통과의 기쁨도 함께했다.
결선에 진출한 국내외 100명의 참가자들은 지난 1년간 지역협의회에서 진행한 예선대회와 지역회의 본선대회를 거쳤으며, 이번 종합결선대회를 거쳐 최후의 1인 자리를 겨루게 됐다. 국내에서는 199개 지역협의회가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약 4개월여에 걸친 기간 동안 예선을 개최해 본선 진출자 8170명을 우선 선발했다. 이들 본선 진출자들은 5월과 6월 사이 각 시·도에서 개최한 본선대회에서 다시 한 번 실력을 겨뤄 89명의 최종 결선 진출자를 가렸다.
47번 문제를 직접 출제한 김덕룡 수석부의장.
해외 지역협의회의 경우, 전 세계 31개국 35개 협의회에서 예선대회를 개최해 98명의 진출자를 우선 선발한 다음 해외 입상자 간의 실력을 겨 루는 해외 결선대회를 가졌다. 지난 7월 9일 한반도통일미래센터에서 열린 이번 해외 결선대회는 국내 학생들과 해외 학생들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통일골든벨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특별했다.
골든벨보다 더 큰 수확은 1박 2일의 우정
민주평통에서는 해외 각 지역협의회와 협조해 초청 학생들의 항공료 일부를 지원하고, 통일·역사 현장 견학을 실시하는 등의 사전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한편 입상 학생들에게는 별도의 장학금도 지원했다. 이날 대회를 통해 최종 선발된 11명의 결선 진출자들은 89명의 국내 지역협의회 출신 결선 진출자들과 1박 2일간 합숙하며 우정을 나누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방송 녹화 하루 전인 7월 21일, KBS 수원센터 연수원 강당에 모인 100명의 학생들은 짧은 리허설을 가진 후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함께하며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친목을 다졌다. 행사는 무더운 여름날의 열기를 날려버릴 만큼 즐겁고 신나는 축제의 분위기로 무르익어만 갔다. 세계 각지의 다른 환경,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온 서로이지만 고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건강한 역사의식, 통일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가진 또래를 만났다는 기쁨만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의 숨겨둔 끼와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졌다. 녹화 당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던 참가자들은 춤과 노래, 개인기 등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선보이며 10대 다운 풋풋함을 뽐냈다. 걸그룹 모모랜드가 특별 초대 손님으로 깜짝 등장해 히트곡 ‘뿜뿜’을 열창하자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광하는 순수한 팬심도 숨기지 않았다. 행사의 막바지, 통일골든벨의 영광을 목전에 둔 긴장된 순간에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아 긴장된 순간을 이어가는 최 군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49번째 문제 앞에서 최 군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사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됐던 조선인들의 합숙소로,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200여 명의 한국인들이 남아 터를 이루게 된 마을의 이름 ‘우토로’를 묻는 질문이었다. 찬스의 기회조차 사용하지 않고 묵묵히 답을 적어나가던 최 군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더했지만 그를 응원하던 친구들과 방청석의 학부모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한 최군과 친구들을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다.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문제를 푼 최용희 학생을 격려하고 축하해주는 참가 학생들.
비록 통일골든벨을 울리는 영광의 순간은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날 행사에 참가한 모든 학생들의 마음에는 이미 커다란 평화와 통일의 골든벨이 울리고 있었다. 이날 최후의 1인으로 선발된 최 군에게는 민주평통 의장상인 대통령상이 수여됐으며 100만 원의 장학금과 대학입학 등록금, 그리고 하와이 어학연수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최후의 2인에게는 30만 원의 상금이, 최후의 3인에게는 20만 원의 상금이 각각 수여됐다.
이날 녹화된 통일골든벨은 8월 12일 오후 7시 KBS-1TV 도전 골든벨 특집 방송으로 전파를 타게 된다.
‘최후의 1인’ 인천 세일고 최용희 학생
“역사에 관심 많은 친구들과 함께, 소중한 1박 2일 추억”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2위를 했던 박태준 군과 룸메이트였어요. 어젯밤 일정이 끝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각자 꿈은 달라도 모두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이야기가 무척 잘 통했어요. 최후의 1인이 될 거란 건 기대조차 하지 않던 일이라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지만 멋진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49번째 문제에서 아쉽게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최후의 1인, 최용희 군. 그의 꿈은 외교관이 되어 한반도가 처한 외교적 문제를 소신껏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역사는 물론 정치와 문화, 경제 문제에 대해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북한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상적인 문제이지만 지금의 갈등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소신도 밝혔다. 북한의 비핵화는 통일을 위해 반드시 이뤄야할 선제적 과제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은 종 식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구소련과 중국도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지 오래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는 물론 제3세계 국가들도 더 이상 공산주의의 프레임을 두고 싸우지 않고 있죠. 우리나라만 유독 이 프레임에 빠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정치에 이용된 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분위기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듯해요. 선거 때만 봐도 지역주의 색채를 보이지 않는 곳들이 많으니까요.”
올해로 세 번째 ‘역사 · 통일골든벨’에 도전했다는 최 군의 ‘최후의 1인’ 노하우는 어떤 정보든 소홀히 지나치지 않고 살펴보는 것이다.
“얼핏 쓸데없는 지식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이고 모여 큰 지식의 덩어리가 되는 법이니까요.”
아프리카 탄자니아 이한빛 학생
“몰랐던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은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사실 제가 있는 곳에선 한국의 이미지가 조금은 무섭게 다가왔거든요. 뉴스만 보면 비행청소년들 얘기도 많이 나와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위험하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하고 착한 친구들이 대부분이란 걸 알게 됐어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선교사로 활동하던 부모님을 따라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건너간 이한빛 양은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난 탓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 양에게 ‘역사 · 통일골든벨’에 도전하는 과정은 몰랐던 한국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선공개한 예상문제만 열심히 풀며 대회를 준비했는데, 막상 본선에 진출해보니 한국의 역사교과서 등에서 출제된 문제가 더 많은 듯했기 때문이다.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한 달간 더 한국에 머무를 계획이니 도서관에 열심히 나가보려 해요. 한국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거든요. 탄자니아에선 한국어로 된 책이 무척 귀하기도 하고, 있는 책들도 모두 낡고 오래된 것들이라 이번 기회에 보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보고 싶습니다.”
이 양의 꿈은 군인이 되어 고국을 지키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할 계획이다. “멀리 떠나 있다 보니 나라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알게 된 것 같아요. 2년 후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