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Ⅰ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남북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하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남북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하다. 한반도 평화의 원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운명공동체 선언이며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 혹은 당사자주의 선언이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남북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하다.

“한국전쟁이 우리를 살렸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핵과 재래식 군비의 전면적 증강과 서독의 재무장, 일본의 재건 등에 관한 미국의 패권 기획(NSC-68)이 6·25 전쟁 이후에야 실행됐음을 강조한 당시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회고다.

6·25전쟁이 미국 패권 제도화의 결정적 계기였다면, 북핵 문제는 소련의 해체에 따른 지구적 냉전 종식 이후에도 한반도의 냉전을 지속시키는 결정적 요인이자 지구적인 미국 패권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명분이었다. 또한 북한의 선(先) 비핵화에 대해 미국이 경제적, 외교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미국의 전통적인 북핵 해법이었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모두 기존의 북한 선비핵화 해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남북 및 북·미관계의 수립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을 ‘한반도의 비핵화’에 우선하는, 한반도 평화의 세 가지 길 혹은 원칙을 천명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남북의 내전 종식 선언이라면,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의 종식 선언이다.

이에 따라 두 개의 현실이 한반도에서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합의된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세 갈래 길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남북과 북·미의 적대의 역사적 관성, 즉 한국을 중심으로 보면 멀리는 6·25전쟁, 가깝게는 탈냉전 이후 북핵 위기를 명분으로 제도화된 한미동맹과 미국 패권의 제도적, 이념적 관성이다.

전자의 새로운 합의를 무시하고, 한국의 보수와 미국의 주류 패권 엘리트들은 북한의 비핵화 없이는 남북 및 북·미관계의 개선이나 한미동맹의 조정, 6·25전쟁의 종식, 한반도 평화체제의 건설 그 어느 것도 불가하다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의 원칙은 상호주의이다. 미국은 북한에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한국도 북한과의 군축과 경제협력 등 판문점 선언의 내용을 이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미 양국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워 게임’을 중단했듯이 기존의 동맹을 조정해야 하고, 한국의 경우에는 내전의 논리에 따른 헌정 질서와 기존 대북정책의 조정까지 감수해야 한다.

대반전 :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혹은 현실주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기존 대북정책을 벗어난 반전과 파격이었다. 우선 미국으로선 한국전쟁 이후 적성국가이자 탈냉전기에는 실패국가이며 불량국가인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는 것 자체가 미국판 문명표준의 역전과 같은 것이었다.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는 트럼프 자신의 2017년 유엔총회 연설의 대반전이기도 했다. 북한이 워낙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어서 핵 억지도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북한과의 직접 협상은 거부하고 북핵 문제를 중국에 하청주면서 한·미·일 군사동맹의 억지와 방어를 강화하는 기존의 ‘전략적 인내’와 비교하면, 북한의 안보 우려를 인정하는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북한 예외주의’의 부정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패권이나 동맹의 문법보다 미국인의 실제 안전과 번영을 우선시한다. 2016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부터 트럼프의 대북정책은 예방전쟁과 김정은과의 직접 협상을 모두 포함했다. 2017년 11월 북한이 미국 본 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예방전쟁은 한반도의 핵전쟁을 의미했다. 이러한 북한의 실제 능력과 핵전쟁의 위협은 트럼프가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수용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3월 8일 트럼프가 한국 특사단의 전언을 듣고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수용한 이후에도 트럼프의 현실적 기대 조정 혹은 북한의 ‘트럼프 방식’에 대한 강요는 계속됐다. 일괄 타결이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 역적인 핵폐기), 리비아 모델 등으로 미국이 북한에 압박을 가하자 북한은 “바로 리비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핵 무력을 개발한 것이며, 북한의 현실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협상에는 임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북한의 반발을 이유로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양측의 우려를 해소하는 ‘트럼프 방식’에 대한 논의를 기대한다는 북한의 입장이 전달되면서 정상회담이 다시 추진됐다.

구체적으로 6월 1일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한 김영철 면담 이후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과 양국의 핵협상이 ‘과정’임을 밝혔고, 6월 11일에는 양국이 새로운 북·미관계, 한반도 평화체제를 ‘한반도 비핵화’에 우선하는 의제로 합의했다. 6월 12일의 공동성명은 일종의 전문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취한 방식’의 의의를 두 가지로 규정했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김 위원장은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확고한 약속을 재확인”하는 안보와 안보의 교환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이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고, 상호 신뢰 구축은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하는 신뢰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들에 따라 양국은 1)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2) 한반도에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3) 북한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과 4) 전쟁포로와 실종자 송환에 합의했다.

새로운 국면

전문과 합의의 구성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상호주의 원칙은 판문점 선언의 한반도 비핵화 관련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판문점 선언은 가장 마지막인 3조 4항에서 “남과 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고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을 평가하고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며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기존 대북정책을 벗어난 반전과 파격이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기존 대북정책을 벗어난 반전과 파격이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인도 순방,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의 3차 방중으로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의 원칙을 확정한,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정상 외교의 국면은 일단락 됐다. 이후의 최대의 과제는 평화의 원칙을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남북한 중심의 쌍무적 전방위 외교는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건설을 위한 다자외교와 병행돼야 한다. 또한 안보 대 안보, 신뢰와 상호주의의 원칙에 따른 기존의 제도와 관성의 개혁도 요구된다.

7월 6~7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3차 방북에 대해 북한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원칙을 저버린 미국의 “깡패와 같은 요구”를 비판했다. 7월 8일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외무장관 회동에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새로운 북·미관계, 한반도의 평화체제와 비핵화가 병행해서 동시에 다뤄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남북관계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운명공동체 선언이며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 혹은 당사자 주의 선언이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남북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하다.

6월 22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6월 22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개혁 없이 평화는 없다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 건설 우선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북한은 물론 미국인의 실제 안전과 번영을 명분으로 자유무역과 동맹에 의존하는 기존의 패권정책을 파괴하고 있는 트럼프의 미국에도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의 원칙은 단순히 대외정책의 조정이 아니고, 체제의 정치·경제적 개혁과 연관된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문재인 정부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여전히 정치적 금기의 영역으로 상정하고 있고, 군축에 따른 새로운 평화·복지국가의 건설 등 평화와 사회·경제적 개혁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안보 전문가들이 북한의 장사정포 후방 배치에 대한 상응조치가 군사적으로 불가하다고 외쳐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패권과 동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넘쳐난다. 방산 비리나 정치 개입의 적폐가 아니더라도, 과거의 ‘정상적인’ 동맹의 군사주의는 한반도 안보 딜레마의 핵심이고, 판문점 시대 개혁의 대상이다. 국가 발전의 새로운 비전을 천명하고 평화의 배당금을 나눠 가질 이익 상관자들을 결집하는 한편, 기존의 관성과 제도에 갇히지 않는 실행계획을 담대하게 시행해나가야 한다. 체제의 개혁 없이 평화는 없다.

6월 19일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걸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6월 19일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걸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이 혜 정 이 혜 정
중앙대 정치국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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