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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물들인 <향수>의 본향,충북 옥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충북 옥천

귀를 기울이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여름이 한바탕 지나간 듯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마가 끝나고 종일을 밤낮으로 달궈대던 볕이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무언가 서늘하고 그리운 것들이 떠올랐다.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우리는 이 시간이 되면 어딘가로 돌아갈 곳을 떠올린다.
큰 솥을 걸어 한솥밥을 나눠먹는 식구들이 기다릴 것 같고, 맨발을 벗고 걱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옛 친구를 만날 곳.
정지용의 <향수>가 그려내는 고향이 위안이 되었던 것은 지치고 상처받은 채로 돌아가더라도
넉넉히 나를 받아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꿈엔들 잊히지 않는 모두의 고향,
정지용 생가와 향수100리길

옥천(沃川)은 ‘비옥한 물줄기’라는 의미다. 풍요로운 금강이 산모퉁이를 돌아 들판을 지난 뒤에, 대청호로 흘러든다. 산과 들, 강과 호수가 어우러져 어딜 가든 풍요롭고 넉넉하다. 그 물줄기의 일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는 시어처럼 아직도 정지용 생가 주변을 흐르고 있다. 한의원이었던 지용의 옛집은 돌담이며 사립문이며 마당까지 당시와 흡사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가 도란도란 정겹게 살았던 고향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은 듯 시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그가 14세에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한 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다시 서울에 정착했어도 고향은 그에게 늘 그리운 곳이었다. 모더니즘 시풍의 개척자로 누구보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시를 썼던 정지용의 대표작이 토속적 정취 가득한 <향수>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의 시에서 고향은 단순히 어린 시절 살붙이들과의 따뜻한 정이 있는 옛 추억에 그치지 않는다. “넓은 벌 동쪽 끝”은 그 누구의 고향까지도 품어내는 우리의 국토 전체, 우리가 지켜야 할 조국이다. 순결한 그 땅을 “꿈에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후 정지용이 국토 순례를 한 뒤 쓴 1930년대 이후 기행문이나 시편에서도 국토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배어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향수>는 상실된 우리의 근본과 원류에 대한 물음이고 재확인이며 그것을 지켜내겠다는 선언이다.

정지용 문학관과 동상 ▲ 정지용 문학관과 동상

‘정지용 생가 입구의 <향수> 시비 ▲ 정지용 생가 입구의 <향수> 시비

정지용 생가 인근에 조성된 향수 공원 ▲ 정지용 생가 인근에 조성된 향수 공원

정지용의 생가 주변은 특히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매년 5월 ‘지용제’가 열리고 있고, 산책하며 돌아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정지용 문학관’과 ‘향수 공원’ 등 문화 공간이 모여 있다. 옥천역에서 시작해 금강변을 따라 정지용 생가까지 조성된 ‘향수100리길’은 자전거 라이딩으로도 유명하지만, 나무 데크를 따라 걷는 강변길은 눈부시고 유려해서 걷기에 좋다.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울창한 숲 그늘,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길 그 어느 풍경도 놓치기 아까운 금강의 한적함은 말 그대로 향수(鄕愁)에 젖게 만든다.

정지용의 생활공간이던 안채 복원 모습 ▲ 정지용의 생활공간이던 안채 복원 모습

‘금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향수100리길 ▲ 금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향수100리길

옛 고향 물길을 따라 지줄대는 힐링 휴양지,
부소담악과 마로니에 숲

'대청호를 따라 섬처럼 솟은 부소담악 ▲ 대청호를 따라 섬처럼 솟은 부소담악 옥천 여행은 물길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더라도 결코 무리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게 된다. 또 다른 명소로 꼽히는 곳은 단연 대청호다. 금강이 자연이 만들어낸 진경(眞境)이라면 대청호는 인간사의 우연한 마주침이 빚어낸 비경(祕境)이다. 본디 이 산골은 매가 많아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매봉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골짜기를 흐르는 푸른 강물 위로 매가 날아가는 풍경은, 1980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물 위에 바위산이 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본디 이곳의 풍수형국이 연화부소형(연꽃이 물에 뜬 모습)이라 마을 이름이 부소머리(부소부니, 부소무니)인데, 그 이름을 따와 부소무니 앞 물 위에 떠 있는 산이라 해서 부소담악(芙沼潭岳)이 되었다고 한다. 대청호의 푸른 물결 위로 본디 마을의 앞산과 진산이었던 봉우리들이 섬처럼 솟아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부소담악의 역사는 채 40년이 못 되었다고 하나 물에 비친 바위산의 경치는 자못 그윽하여 지나는 이의 마음을 잡아 끈다.

능선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시원스레 호수 주변을 걷던 발을 문득 멈춰 생각하게 된다. 과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물속에 잠겨 있을 논과 밭을 바라보았을 실향민의 마음도 떠오른다. 문득 먼저 지나왔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이곳에 와서야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우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잊어가는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방학 때마다 시골 외갓집에서 수박도 잘라 나눠먹고 모깃불도 피워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눌 때도 있었다지만, 세월이 많이 변해 그런 풍경도 향수를 일으키는 옛 추억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손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향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장찬 저수지를 바라보는 마로니에 숲 캠핑지 풍경 ▲ 장찬 저수지를 바라보는 마로니에 숲 캠핑지 풍경

최근 캠핑장이나 휴양지가 각광받는 건 어쩌면 현대인 마음의 고향의 기능을 숲과 물가의 풍경 좋은 곳에서의 휴식이 대신하고 있다. 옥천의 ‘마로니에 숲’은 장찬저수지를 끼고 있어 물안개와 석양의 노을을 배경으로 여름에는 수변에서 민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겨울에는 빙어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이다. 어우러지는 옛 고향 추억을 통해 힐링하는 셈. 곧 다가올 가을에는 캠핑장 내의 밤나무, 감나무, 호두나무의 유실수 수확도 함께 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가 오히려 나의 고향을 찾은 것처럼 위로받는다. 언제든 돌아가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평온한 풍경들.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있을까.

바위에 새긴 그날의 역사,
문바위 동학혁명유적지

‘문바위골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선 바위들 ▲ 문바위골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선 바위들 옥천은 금강변의 풍요로운 들판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얼굴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옥천의 동쪽인 청산면 문암리 문바윗골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전국의 동학도들이 집결하였다. 현재의 정읍인 옛 고부군에서 전봉준이 봉기를 일으킬 때, 당시 최시형은 이곳에서 ‘재기포령’을 내려 강원, 경상, 전라 등지의 동학군을 모았다. 문바위는 동학 교단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던 동학의 중심이자 요새로, 현재는 최시형의 집터와 동학혁명군의 훈련터, 최시형의 아들 최봉주의 묘 등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그들이 말을 매어두었던 버드나무 말뚝이 되살아나 무성한 버드나무 숲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 기념비와 기념공원 ▲ 동학농민운동 기념비와 기념공원 문바위골의 좁은 마을길을 따라 그 흔적을 찾아갔을 때, 간간이 보이던 안내표지판도 어느새 사라지고 빈 집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고요한 농촌 마을의 낯선 풍경뿐이었다. 하지만 우뚝 서 있는 바위들을 보니 풍경 또한 달라졌다. 이곳은 바위가 병풍 형상으로 둘러 쳐 있어 최상의 요새였다고 한다. 산도 강도 비틀려 흩어지고 역사가 상실되었을 때 실패할 줄 알면서도 결연히 몸을 일으킨 민중들의 성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향수>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박혀 있는 절절한 그리움의 원류는 그보다 한 세대 앞서 불꽃 같이 살았던 동학군에게 이어받은 슬픔이 아닐까, 그 슬픔이 금강의 줄기를 따라 오래도록 흘러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슬픔이 그 어린 자식의 다시 어린 자식으로, 시대를 초월해 나의 가슴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만 같다.

텅 빈 공간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그리워한다. 무엇을 또 기억해야 하고 어떤 이야기를 남겨야 하는가. 좁은 산길을 타고 오르는 도로는 산속으로 이어진다. 여기 마음 한 자락은 남겨두도록 한다. 지금의 흔적은 사라지더라도 또 마음은 머물러 있지 않겠는가. 먼 후일 누군가가 이 길을 지나는 날, 행여 그 시름 덜고 위로가 될 바람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니. 그러면 이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어 있던 애틋한 추억이 피어날지니.

<글: 김혜진 / 사진: 김규성>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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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08-1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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