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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지킴이 / 6·25 참전 재일학도의용군 초청하다

6·25 참전 재일학도의용군 초청하다
영원한 청년들, 조국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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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재일학도의용군 초청 행사의 국민의례에서 태극기 앞에 거수로 경의를 표하는 노병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국내외에 생존한 재일학도의용군을 초청해 2박3일 일정으로 보훈 행사를 개최했다. 18세의 고등학생을 포함해 642명이 의용군에 지원했고 그중 135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이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해외 거주 이스라엘 국민이 자진 입대한 것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선 것이다.

교복 차림의 풋풋한 청춘들이 모여 결연한 의지로 태극기에 ‘조국 수호’, ‘애국혼’, ‘조국애’, ‘호국용사’, ‘공산당 타도’ 등의 글씨를 쓴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의 탄생. 이 한 장의 흑백사진이 그들만의 출정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했다는 다급한 소식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광복 이후 일본에 머물며 반공 투쟁을 계속해오던 민단계 청년과 학생들은 곧장 주일대표부(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 한국을 대표하여 일본에 주재한 외교사절단)를 찾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두고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참전 의사를 전했다. 수천 명의 자원자 가운데 최종 선발된 642명의 의용군은 미군에 배속돼 사격·제식훈련 등 2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1950년 9월 1진 78명(학생 58명, 일반인 20명)이 대한해협을 건너 인천으로 향했다. 이렇게 떠난 642명 중 135명이 전사(52명)하거나 실종(83명)돼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생존한 37명 가운데 1명이 미국, 12명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는 한국에 정착했다. 당시 18세의 대학생이었던 조승배(82·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사무총장) 옹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1959년 이승만 정부 때 재일동포 북송 저지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21세의 대학생이었던 이성근(87) 옹은 1진 인솔자로 미군 수송선을 타고 인천에 상륙했다. 30세로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던 이봉남(95·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일본지부장) 옹은 막냇동생뻘인 동지들과 함께 총을 잡았다.

“남북통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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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헌화하고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의식을 가진 학도의용군들.

그들이 돌아왔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국내외에 생존한 재일학도의용군을 초청해 2박3일 일정으로 보훈 행사를 개최했다. 첫날인 6월 23일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는 16명의 학도의용군이 참석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87세.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했어도 노병의 걸음걸이에는 위엄이 넘쳤고, 훈장을 단 가슴은 꼿꼿했다.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축사에서 “병역 의무도 없던 재일 한국인 청년들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뛰어든 것은 조국 없는 설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뼛속 깊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조국애와 희생정신이 낙동강에서 대한민국을 구했고, 오늘 대한민국 성공의 기반이 됐다”면서 “선배님들이야말로 의인이요 영웅”이라고 말했다.

김병익(85)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은 6·25전쟁 64주년을 맞아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민주평통에 감사의 뜻을 전한 뒤 “재일학도의용군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노병이 이루지 못한 남북통일을 민주평통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기필코 이루리라 믿는다”고 말해 모두를 숙연케 했다. 최고령 생존자인 이봉남 옹도 “통일이 될 때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학도병의 정신을 기려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서 성태진 민주평통 상임위원의 축시 낭송과 소프라노 이은정 씨의 축하 공연이 있었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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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남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일본지부장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봉남(95) 옹은 서른 살로 신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파죽지세의 북한군이 낙동강만 넘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상황. 그는 참전을 결심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과 조총련계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는데, 조총련계가 50만 명이라면 민단은 10만 명도 안 됐어요. 지금은 그 반대지. 민단은 45만 명, 조총련은 10만 명도 안 돼요. 이것만 봐도 우리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것이 옳았다는 거지.”

이 옹에 따르면 재일학도의용군에 지원한 사람은 4300여 명이나 됐지만 조총련계는 지원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선발된 642명이 초기에는 미군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각종 전투에 참전했고, 중공군이 참전하자 ‘3·1독립보병대대’를 창설해 압록강과 두만강 전투, 원산 철수작전s에 투입됐다. 전쟁에서 13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유해도 유품도 건지지 못한 실종자가 83명이에요. 이들을 포함해 135명의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의 이름을 새긴 위령충혼비를 건립하고자 1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 이미 400만 엔의 성금을 모았습니다. 충혼비는 도쿄의 한국중앙회관 부지 내에 세워지는데 오는 9월 인천상륙작전일에 맞춰 제막식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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