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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만 양안관계에서 배운다
교류협력 확대로 ‘사실상의 통일’ 실현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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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13년 9월 경기 파주시 판문점 내에 있는 최전방 소초 오울렛 OP에서 바라본 개성공단 옆 인공기와 주체사상탑 모습.

<통일시대>는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해 한국 사회가 통일친화적 입장에서 추진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분야별로 점검하고 있다. ‘통일친화적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통일친화적 국제 환경 조성 위한 통일외교 전략’, ‘통일교육의 내실화’에 이어 네 번째로 ‘남북 간 교류협력의 확대 방안’에 대해 알아본다.

독일이 통일된 지 반세기가 지나간다. 우리도 독일을 따라 곧 통일이 되리라는 당시의 기대는 허탈감만 남기고 안갯속으로 기약 없이 사라졌다. 우리의 통일이 독일보다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독일은 평화 상태에서 바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전쟁 상태에서 평화와 통일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 문제가 갖는 현상적 유사성 때문에 오도되기도 하지만,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감안하면 독일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한반도의 사례는 독일보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와 유사한 점이 더 많아 보인다. 한반도와 중국은 비슷한 시기에 분단됐고, 공산주의자가 개입해 동족상잔의 내전을 치렀다는 점에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내전의 포성이 멎은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이념 갈등과 대립을 지속했으며, 우리가 남북교류를 시작한 때와 중국에서 양안교류가 시작한 시기마저 비슷하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양안관계의 현주소를 보면, 크게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다. 우선 양안관계의 긴밀한 교류협력 현황을 우리와 비교해보자.

양안관계의 기초가 된 ‘1992년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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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13년 4월 3일 북한의 일방적인 통행 제한 조치로 가동이 중단됐던 개성공단이 160여 일 만에 재가동돼 SK어패럴에서 근로자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에게 북한 방문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것은 1988년의 ‘7·7선언’부터이며, 대만인의 본토 방문이 허용된 것은 1987년으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방북이 허용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국민 약 300만 명이 북한을 다녀왔다. 같은 기간에 중국 본토를 방문한 대만인은 약 7000만 명(누적 계산)이다. 대만 인구가 2300만 명임을 고려할 때 여행 가능한 사람은 대부분 중국을 다녀온 셈이다.

우리는 북한에 개성공단 관계자 약 700여 명만 상주하는 데 반해, 대만인은 대륙 여기저기에 공장과 사무실을 차려놓고 약 200만 명이 상주하고 있다. 중국도 최근에야 본토인의 대만 방문을 자유롭게 허용했지만 이미 200만 명이나 대만을 방문했다. 최근에는 대만의 관광지와 호텔은 대륙에서 온 관광객으로 만원이라고 한다. 양안 간에 항공기가 주당 700편 왕래하고 있다. 본토인과 대만인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고, 현재 약 20만 명의 대륙 출신 며느리가 대만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상 통일된 것이나 다름없다.

양안 간의 교역과 투자 관계는 더욱 밀접하다. 교역 규모는 1000억 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이며, 상호 직접 투자도 3000억 달러를 넘었다. 대만의 10만 기업이 본토에 공장과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본토인은 대만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은 최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도 체결했다. 상대방의 경제에 대한 타격은 곧 자신의 경제에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양안 간 전쟁 가능성도 크게 낮아진다. 대만은 올해부터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실시한다.

양안관계가 남북관계보다 활발히 발전한 까닭은 중국과 대만이 남북한보다 애초부터 적대관계가 덜 심했다거나 대결심리가 느슨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반도 내전은 3년이었지만 중국에서의 국공 내전은 무려 22년간 진행됐다. 내전 후에도 양안 사이 섬들을 두고 30년간 지속적으로 무력충돌이 있었다. 중국과 대만도 학교교육을 통해 자국 학생들에게 상대방을 악마로 가르치고 대중매체에서도 상호 비방에 열을 올렸다.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기 전까지의 모습은 우리와 같다.

출발은 비슷했던 남북관계와 양안관계가 오늘날 이 정도로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되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대만도 우리처럼 상대방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양안 간에는 아직 당국 차원의 공식 대화가 없다. 중국과 대만의 당국자들은 우리보다 16년 늦게, 그것도 민간의 가면을 쓰고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대만은 각각 ‘해협양안관계협회’와 ‘해협교류기금회’를 설립했다. 정상회담도 우리보다 8년 늦었지만 정부 대표 자격이 아닌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표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고집불통의 원칙 고수주의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양안관계가 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신의 원칙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들의 원칙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존중한다는 것이다. 양안관계의 기초는 ‘1992년 공식’이다. 1992년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의미는 각자 해석한다(一個中國 各自表述)’는 데 합의했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 상대방도 입장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23년 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했지만 진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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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월 18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오른쪽)과 롄잔 대만 국민당 명예주석이 베이징에서 만나 양안관계의 발전에 대해 논의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한다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지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도 1991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했으니 비슷한 시기에 쌍방 기본관계에 대해 합의를 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실은 결코 합의할 수 없는 원칙 문제를 우회하기 위한 전략적 합의(Agreed Principles with Strategic Ambiguity)에 어렵게 도달해놓고는 다시금 결코 일치된 해석에 도달할 수 없는 문제를 꺼내서 “합의했는데 왜 다른 해석을 하느냐”며 서로 불신을 쌓아가는 식이다.

합의할 수 없는 문제는 ‘합의할 수 없다는 것에 합의’를 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양안관계처럼 지속적으로 발전할 기초적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다. 양안관계는 이제 상호 불인정(不認定) 관계에서 상호 불부인(不否定)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반면 남북관계는 아직도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거나 상대방이 자신을 붕괴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수준이다. 상대가 자신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원칙을 허물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의심 속에서는 서로의 관계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남북 교류협력은 상호 왕래와 교역의 확대를 통해 서로 적대감을 완화하고 새로운 이해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전쟁의 가능성을 낮추면서,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1988년 ‘7·7선언’ 이후 2000년대 초까지 약 20년간 많은 국민들이 남북 교류협력에 직접 참여하고 ‘사실상의 통일 상태’ 실현 가능성을 확인했다.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이 그리던 남북연합의 입구까지 접근했던 적이 있다. 남북 교류협력이 절정을 이룬 2007년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 평균 300대의 차량과 30대의 선박이 남북을 드나들었으며, 비행기는 이틀에 한 번꼴로 승객을 수송했다. 남북 사이의 하늘길, 뱃길, 땅길이 모두 열렸다. 매달 3만 명의 관광객 외에도 1만 명 이상의 우리 국민이 이러저러한 일을 보기 위해 북한 땅을 밟았으며, 남북의 기업들 간에는 1억 달러 이상의 물자를 서로 거래했던 적이 있었다.

엄연하게 존재하는 남북 사이의 적대관계라는 현실과 폐쇄적인 북한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이러한 남북 교류협력의 확대를 통해 한반도에 ‘사실상의 통일 상태’ 실현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은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북 교류협력의 외형이 확대되면서 내용적으로도 내실 있는 사업들이 다양하게 전개됐다.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매년 두세 차례 사실상 정례적으로 이루어져 향후 상시적 상봉의 길을 열었으며, 이를 위한 이산가족 면회소도 완공됐다. 남북 경협도 일회성 교역에서 점차 임가공 등 협력사업 형태로 지속성을 띠었다. 특히 개성공단 사업은 일손 부족과 인건비 상승으로 한계 상황에 처한 남측 중소기업과 일감이 없어 힘들어하는 북측 근로자가 결합해 새로운 국제 경쟁력을 창출한 사업이다. 개성공단의 성공으로 남북경협 확대 전망은 높아졌다.

그러나 현재는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남북 경협은 중단 상태이며, 기타 남북 교류협력도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최근의 남북관계의 대립과 갈등으로 남북 교류협력은 1988년 ‘7·7선언’ 전후의 상태로 20년 이상 후퇴했다. 특히 ‘5·24 조치’는 당초 의도했던 북한에 대한 징벌적 효과보다는 우리 기업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경협보다는 북중 경협에 과도할 정도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한중관계의 비약적 발전 경험을 회고해보면, 남북관계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 또한 새롭게 모을 수 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한 지 20년 만에 상호 적대관계를 선린관계로 변화시킨 것은 양국 정치인과 외교관들의 부단한 대화 노력과 함께 상호 인적, 물적 교류를 확대 발전시켜나가는 실질적인 상호 이해관계의 기초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과거 6·25전쟁 때 우리와 총칼을 겨눈 교전 상대국이자 지금도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중국의 개입만 없었어도 우리는 벌써 통일이 돼 있었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의 철천지원수다. 지금은 그런 원수와 친구가 됐다. 말과 문화가 다른 중국과 우리 사이의 적대관계를 선린관계로 만든 것이 그동안의 인적, 물적 교류와 협력이다. 한중 간의 인적, 물적 교류협력의 규모는 우리와 미국, 우리와 일본의 교류협력의 규모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남북 간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남북 교류협력의 기대이자 목표다.

사실상의 통일,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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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13년 1월 3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중국-대만 항공사 제휴 행사를 앞두고 4개 항공사 소속 승무원들이 단체 촬영을 하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이날 대만 국적 중화항공(中華航空)사와 중국 국적 난팡(南方), 둥팡(東方), 샤먼(廈門) 항공 3곳이 여객운송 서비스의 제휴를 강화했다.

아직 상호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남북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면 남북 교류협력은 한중 교류협력보다 더 어렵고 큰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남북 교류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남북관계의 적대 구조가 화해협력 구조로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적대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성찰한다면 아직 실망하거나 포기할 단계는 아니다. 26년 전 ‘7·7선언’의 결단처럼 ‘5·24 조치’의 해법도 과감하고 선제적인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며, 지금이 바로 그러한 결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본다.

중국과 대만이 이루어놓은 양안관계의 성과를 보면서, 과정으로만 본다면 한반도 통일도 남북 교류협력을 통해 이미 그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지금은 주춤거리고 있을지라도 분명 통일로 향한 첫발을 뗀 지가 꽤 됐다.

한반도 통일의 시나리오와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지금은 비록 명확해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 우리가 취하는 행동들 하나하나가 누적적으로 향후 통일의 양상과 시나리오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photo 고경빈 평화재단 이사.
서울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더램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통일부 정책홍보부장,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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