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길게만 느껴졌던 4월에 작별을 고하며, 본능처럼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언젠가의 봄날,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추억의 조각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곳. 소리 내 웃고, 우는 것이 가장 쉬웠던 그 시절의 기억을 둥지삼아 몸을 웅크리자 물기 어린 바람이 가만가만 등줄기를 쓰다듬는다. 봄 춘(春)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춘천이라 불리는 도시, 그 곳에서 만난 위로의 이야기다.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은, 사철 봄 같은 도시’란 어느 시인의 예찬처럼 춘천은 언제나 봄이다. 그리고 하늘도, 숲도, 호수도. 봄을 품은 도시는 온통 푸르다. 눈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짙푸른 봄의 생명력을 만끽하기 위해 청평사로 향한다. 소양호가 애지중지 품고 있는 천년사찰, 청평사에 닿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물길이고 다른 하나는 땅 길이다. 물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소양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된다. 느리게 물살을 가르는 통통배에 올라 10여 분 정도 가면 비로소 청평사 선착장에 도착한다. 지금부터는 그저 걸으면 된다. 소란스러운 식당거리를 지나 산자락 더 깊숙이, 계곡의 물소리를 쫓아 걷는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 조그맣고 재빠른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을 때쯤 고개를 들면 어느새 계곡이 지천이다. 너무 맑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 물은 바위를 지나 매끄럽게 흘러내린다. 땀을 식힌다는 핑계로 계곡 옆 바위에 대충 걸터앉아 눈을 감자, 봄이 더 가까이 들린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드디어 청평사다. 급할 것 없이 사찰 앞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절터로 들어서자 절로 탄성이 터진다. 산 아래보다 느리게 꽃망울을 터트린 벚꽃이 눈송이처럼 휘날리고, 색색의 연등이 나란히 몸을 부대끼는 봄의 풍광. 그렇게 반길 새 없이 멈춰버렸던 봄날이 천천히 다시 흐른다. 새삼 코끝이 찡해온다.
북한강물 위 반달 모양으로 떠 있는 섬 하나가 있다. 원래는 홍수가 났을 때만 고립이 됐던 반쪽짜리 섬이었지만 청평댐의 건설로 강물이 차서 내륙의 섬이 됐다. 처음에는 모래뿐이었던 둘레 5km, 면적 43만 평방미터의 섬에 한두 그루, 나무가 식재되고 곧 숲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숲을 둥지 삼아, 새와 바람, 들꽃과 별빛 그리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곳을 남이섬이라고 부른다. 섬은 그 자체만으로도 ‘쉼’이 된다.
행정구역 상 남이섬은 춘천에 속하지만 섬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선착장은 가평군에 속해있다. 5~6분 정도의 짧은 시간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나무 내음이다. 푸른 강을 타고 넘어온 봄바람에 길가의 작은 들꽃이 흔들리고, 고른 흙길을 사이에 두고 메타세콰이아 길이 이어진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은 봄이다.
아찔할 정도로 푸르른 나무들과 그 사이로 비치는 찬란한 봄 햇살, 여행객들의 건강한 웃음소리로 섬 구석구석 생기가 넘친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남이섬은 엄연히 관광목적으로 조성된 공간. 덕분에 푸른 자연과 더불어 볼거리와 체험거리 역시 다양한 것이 특징. 방송체험시설인 ‘NAmbc’에서는 방송 제작 시스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열 한 명의 작가들이 활동 중인 공예원에서는 도자기 만들기, 유리공예 등을 각종 공예 만들기에 도전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옛 청춘의 기억을 뒤적이자면 언제고 풋풋했던 첫사랑이 함께 떠오르기 마련이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려워, 멀찍이 바라보다 발만 동동 굴러댔던 서툴고 풋풋했던 그 마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핏 웃음 짓게 되는 그 때의 설렘을 가슴에 품고 경춘선 김유정 역에 내린다. 춘천 출신의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딴 이 곳에는 소설 속 실제 무대인 실레마을과 김유정생가가 있다.
금병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품고, 그 아래 소박한 논밭과 한낮 오수를 못 이겨 고개를 떨구는 강아지가 있는 정겨운 전원의 풍경 속을 걸어, 역에서 5분 거리의 김유정문학촌으로 향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디선가 심통 난 점순이에게 괴롭힘 당하는 수탉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동백꽃’ 中)와 대체 언제쯤 성례(결혼)시켜 줄 거냐는 볼멘 목소리(‘봄,봄’ 中)가 들리는 것 같은 장소가 바로 김유정의 생가다. 6.25 전쟁 중 파괴되었다가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고증을 거쳐 복원해, 생가와 기념전시관을 묶어 김유정문학촌으로 개관했다.
한 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공간에는 작지만 운치 있는 연못과 정자, 소설 속 장면을 연상시키는 ㅁ(미음)자 마당이 있는 생가와 기념전시관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특히 이 맘 때라면, 봄감자 세 알에 첫사랑의 서투름을 담은 소설 ‘동백꽃’의 진짜 ‘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소설 속 흐드러진 노란꽃 무더기는 남부지방에 피는 빨간 동백꽃이 아닌 강원도의 생강나무(동박나무) 꽃을 말한다. 먼 산등성 어디쯤, 노란 꽃무더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알싸한 생강내음이 나는 듯도 싶다.
해질녘. 결 고운 은빛 모래를 뿌린 듯 반짝이는 소양강변을 걸어본다. 사계절 언제 걸어도 후회가 없는 길이다. 봄날이 찬란할수록 아릿해지는 심장을 다독이며, 멀리 시선을 두자 소양대교 인근 높다란 탑이 보인다.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내 무공탑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지역, 밀어닥치는 북한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이 땅을 지켜낸 이들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혼란한 전시, 책 대신 총을 움켜쥐어야 했던 학도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탑도 나란히 위치해 있다. 두 번 다시 이 땅의 무고한 청춘들이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일이 없기를. 눈을 감자,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진다.
한없이 느리게 걷고, 쉬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흘러가는 강물 위 꾹꾹 참아왔던 감정을 털어내자 뱃속까지 허한 기분이다. 춘천을 떠나기 전 명물이라는 막국수 한 그릇쯤은 먹어줘야지 않겠나 싶어 길을 재촉한다.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내는 막국수에 숙주, 오이, 김가루, 달걀 등의 고명을 소복이 얹어, 슬슬 비빈 후 후루룩 넘긴다. 향긋한 메밀 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 투박하게 넘어가는 국수 가락까지. 특별할 것 없어 더 반가운 음식이다. 뱃속까지 든든하게 채웠으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직 우리의 봄날은 끝나지 않았기에….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