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만나다│길위의 풍경

계절의 틈바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 경남 통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파도가 일었다. 몇 번의 자맥질 후 제 몸집을 산처럼 불린 파도가 입을 벌리자 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꺼먼 구멍 속으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이길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기겠다고 각오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살기위해서는 이기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공포와 맞서 파도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스크린 속 이순신 장군이 고작 12척의 배로 330여 척의 적군과 맞서, 승리한 ‘명량해전’을 보고 있자니, ‘진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장군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이 땅의 바다가 말이다. 그래서 떠났다. 경남 통영의 바다에는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었다.
스크린 속 이순신 장군이 고작 12척의 배로 330여 척의 적군과 맞서, 승리한 ‘명량해전’을 보고 있자니, ‘진짜’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장군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이 땅의 바다가 말이다. 그래서 떠났다. 경남 통영의 바다에는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었다.

짙푸른 바다에 새겨진 역사

거북선 ‘바다를 포기하면 조선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 멀지만은 않은 옛날, 서슬 퍼런 장군의 호령이 쩌렁쩌렁하게 울렸을 통영의 앞바다는 생각보다 잠잠했다. 푸른빛으로 감싸인 항구는 역사 속 위협적인 모습과 달리 일견 호수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파도가 들이칠 적마다 짠 내 가득한 몸체를 뒤척이는 거북선과 한 번씩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바다의 울음소리가 만만치 않은 바다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흔히 통영을 ‘충무공의 도시’라고 표현한다. 통영이라는 도시 명 자체도 수군통제사가 머문 통제영이 있던 자리란 말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당시 해안 경비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조정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고, 초대 통제사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또한 장군의 시호인 충무는 통영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모른다 해도 통영을 여행하며, 이충무공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섬, 서슬 퍼런 기상을 품다

한산도 일출 특히 한산도는 섬 전체가 충무공의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항되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30여 분을 더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인 일대의 크고 작은 섬들을 구경하기에 긴 시간은 아니다. 뭍에서 봤던 바다와 바다 위에서 보는 바다는 또 다른 얼굴이다. 얌전한 듯 난폭하고, 거친 듯 다정하다. 물길을 넘어 마침내 한산도다.

절벽 해안으로 구성된 바위섬인 한산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승기를 잡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구성해 조선의 수군을 공격했다. 절대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 충무공은 인근 바다로 적을 유인해 적선 70척 중 66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바로 ‘한산대첩’이다. 장군의 사적지로 유명한 ‘제승당’ 주변을 부지런히 구경하다, ‘한산(閑山)셤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자 큰 칼 옆에 차고 기픈 시름 하는 적의..’의 싯구로 유명한 수루에 올랐다. 잉태를 앞둔 가을 바다의 풍광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아름답기에 서글펐을 그 밤의 바다를 상상하며 풍광에 젖어든다. 그리고 다시 육지로 향하기전 충무사에 들려보길 권한다. 시대를 호령했던 이 충무공의 기개를 닮은 송림의 모양새도 빼어나지만 이 충무공의 영전 앞에 향 하나 피우는 것도 좋으리라.

한산도 전경 / 제승당

길을 걸어, 영웅을 만나다

그러나 뱃길이란 사람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없는 법. 혹여 기상의 영향으로 한산도에 닿을 수 없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충무공의 신위를 모신 충렬사와, 경복궁의 경회루와 여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세병관 등은 육지에서 만날 수 있는 장군의 흔적이다.

충렬사 사당 먼저 충렬사는 왕명에 따라 지어진 이 충무공의 사당이다. 신위를 보기위해 시작한 발걸음 홍살문을 지나 정문에 오른 후 강한루와 외삼문, 중문, 내삼문 등 네 겹의 문을 차례로 지난다. 문을 하나씩 지날 때 마다 발걸음도 마음가짐도 새삼 차분해 진다. 신위 외에도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의 수훈을 전해들은 명나라의 황제가 이충무공에게 보낸 8가지 물품인 ‘명조팔사품’도 놓치면 아쉽다.

그런가 하면 압도적인 규모로 발길은 물론 시선마저 붙잡는 세병관은 이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객사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박경리, 김춘수 등이 다녔던 학교로 사용됐던 곳이기도 하다. 전쟁이 종결되길 원하는 바람으로 지어진 세병관이란 명칭을 새겨 넣은 거대한 현판을 지나 마루에 앉아본다. 나른한 햇살 아래 시선을 멀리 두자 통영의 땅과 바다가 평온히 펼쳐진다.

세병관 / 통영항 / 미륵산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이외에도 원 없이 바다를 마주할 수 있는 이순신 공원은 해안을 따라 걷기에 좋아, 관광객은 물론 통영시민들도 곧잘 찾는 휴식처이며, 한국의 명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륵산은 통영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날이 맑으면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는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의 빼어난 풍광 역시 놓치기 아쉽다.

파도, 시이자 그림이자 음악이 되다

김춘추 생가 / 청마거리입구-청마동상 사실 통영이 이충무공의 사유지로만 유명한 곳은 아니다. 예향(藝鄕)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통영의 항구는 언제나 인파로 북적인다.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풍부한 해산물은 미식가를 자청하지 않더라도 사시사철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잡을 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뿐인가. 이 깊고 푸른 바다의 정취에 취한 예술가들도 한 둘이 아니다.

통영의 물색, 파도소리, 초목. 그 모든 자연이 소리로 들렸다는 작곡가 ‘윤이상의 기념공원’이나 작고하기 까지 고향, 통영을 지켰던 화가 ‘전혁림 미술관’, 꽃 같은 시인 ‘김춘수 유품전시관’, 생전에 유치환이 즐겨 걸었던 골목이라 이름 붙여진 ‘청마거리’, 소설가 ‘박경리 기념관’ 등 학창시절 흠모했던 예술가들의 발자취도 이곳 통영에서 만날 수 있다.

청정해역이 차려낸 '진짜' 밥상

볼거리만큼이나 특색 있는 먹거리도 넘쳐나는 통영. 플랑크톤이 많은 남해 앞바다는 어류가 풍부한데다 항구 도시답게 토속음식 역시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일까. 통영시 식당 간판에는 ‘원조’란 말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먹거리가 통영에서 태생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멍게비빔밥 / 싱싱한 활어회 / 충무김밥 가을 이맘때쯤이라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어가 별미이며, 요새는 보관법이 발전해 사철 즐길 수 있는 바다 향 진한 멍게비빔밥이나 싱싱한 활어회도 놓칠 수 없다. 또 김밥에 오징어무침과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충무김밥과 통통하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굴이나 특산품인 멸치를 이용한 코스요리, 된장으로 양념한 통영 식 시래기국인 시락국, 간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꿀빵까지. 관광일정 뿐만 아니라 먹거리 일정을 따로 챙겨야 할 만큼 ‘먹거리천국’이다. 혹시 1박 이상 머물 계획이라면 일인 당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주류와 제철 안주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주는 ‘다찌’도 즐겨볼 것을 권한다.

<글. 사진. 권혜리 통영시청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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