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아니오, 육지도, 숲도 아닌 곳. 그럼에도 이 여름 가장 선명한 짙푸름에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는 곳. 흐르는 듯 멈춰 있고, 고여 있는 듯 다시 흘러가는 곳. 1억 4000만 년 전의 기억들이 남아 야트막한 물가에 터를 잡고, 지금 이 시간에도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곳. 태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곳을 우포늪이라 부른다.
아직 이른 새벽이건만 하늘의 맑음이 심상치 않다. 틀림없이 무더우리란, 각오를 하고 떠난 길. 그럼에도 더웠다. 그렇게 이마 위 송글송글 맺혀든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마주한 늪은 지독히 선명했다. 늪의 특성상 분명 그리 깊지만은 않을 터인데, 진초록 수초에 쌓인 늪은 한없이 깊고, 진했다. 태고적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뿌리내린 둥치 두터운 나무그늘을 은신처 삼아, 잠시 숨을 돌리자 바람이 분다.
약 70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늪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규모의 늪지대인 이곳은 지난 2008년 람사르총회 공식 탐방 습지로 인정받았을 만큼 자연생태적인 가치가 높은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흔히 우포늪이라고 불리지만 우포 외에도 목포, 사지포. 쪽지벌 등 총 4개의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줄잡아 1,000여 종의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가시연꽃이 대표한 수백 여의 수생식물과 곤충, 물고기와 조류까지.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따라 순리대로 삶이 공존한다.
탐방로의 총 길이만 해도 12km 정도. 하루 만에 걸어서 다 둘러보기에 녹록치 않은 길이니, 산책로 중 시간적, 체력적 여건에 맞춰 골라서 걷거나, 생태관 인근에서 자전거를 대여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빠르게 지나면 그만큼 보지 못하는 것도 많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자연은 내보이기보다 감추고 있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주차장 바로 앞에 위치한 생태관에 둘러볼 것을 권한다. 우포의 사계절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간 우포에 서식하는 생물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늪의 사전적 의미는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자연적’으로 물이 낮게 고여 있는 지대란 뜻이다. 하지만 이 낮게 고인 물도 어딘가 시작이 있을 터. 우포늪의 경우 낙동강에서 기인한다. 우포늪만이 아니다. 창녕군 역시 낙동강을 자양분으로 터를 세운 고장이다. 창녕은 경남지역 낙동강 중 절반 이상이 지나는 골목이다. 푸근하고 넉넉한 물줄기가 지나는 고장은 일견 풍요롭고 평화롭다. 하지만 낙동강의 눈부신 절경 뒤로 6.25 한국전쟁 당시 많은 상흔을 입은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낙동강 전선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박진지구의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 중요전투였다.
남지읍의 호젓한 마을에 위치한 박진전쟁기념관에서는 당시의 긴박했던 위기의 순간과 전쟁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일부러 발길을 옮길 만하다. 또 기념관 바로 앞 야트막한 산길을 10여 분쯤 오르면 박진지구전적비가 박진나루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경계도 없이 넘실대는 물길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평화란 두 글자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숭고한 이들의 넋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어서가 아닐까.
멀리서 바라보는 낙동강이 감질나 남쪽을 향해 달린다. 토지를 적시고 그 땅에 씨를 뿌려 일구도록 돕는 낙동강은 경작지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창녕의 낙동강 역시 물줄기와 반대편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이 어우러져 전형적인 농촌의 풍광을 자랑한다. 자전거길과 잘 정비된 공원도 여럿 있어 쉬어가기 좋은 데 특히 남지읍 쪽은 강과 가까워 풍경을 쉬어가기 좋다. 봄이면 샛노란 꽃망울이 강바람에 흔들거리는 남지유채꽃 단지도 이곳에 위치한다. 계절 옷을 갈아입은 탓에 여린 꽃망울을 구경하진 못하지만 초록빛 여름풍경 사이로 파란색 남지철교와 빨간색의 새남지교가 나란히 어우러진 풍경도 멋스럽다.
창녕은 또 온천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온천특구인 부곡온천은 피부노화와 성인병 예방치료에 탁월한 효과 덕분에 계절과 관계없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며, 탁 트인 야외를 선호한다면, 크고 작은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호쾌한 옥천계곡도 빼놓을 수 없다.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장의 이 곳, 저 곳을 누비는 동안 뱃속이 출출해진다. 배가 고파지니 자연스레 발길이 시장으로 향한다. 창녕시장은 5일마다 열리는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기 시장이다. 역사로 따지자면 구한말 보부상들의 주요활동 지역이었던 곳으로 기세가 예전만 못하다 해도 장날이면 정겨운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특히 유명한 것이 있으니 바로 수구레국밥이다. 수구레란 소가죽 안쪽에 붙어있는 부위를 말하는데, 장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이 수구레로 얼큰하게 끓여낸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있자면, 세상 그 어떤 성찬도 부럽지 않다. 시장 뒤쪽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인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과 국내 민가 중 가장 오래된 초가집인 하병수 가옥 등 산책 겸 구경해 볼만한 곳도 많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