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가 한창인 와중에도 역사드라마 <정도전>의 인기가 뜨거웠다. 선이 굵은 역사드라마의 인기가 이처럼 뜨거웠던 것도 오랜만이다. 축구에서 드라마틱한 승리를 꿈꾸듯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심리가 드라마에도 반영되기 때문일까.
역사는 언제나 매혹적인 드라마의 소재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른바 선이 굵은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란 쉽지 않다. 물론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이 굵은 사극을 만들어 내기 쉽지 않은 것은 건국과 난세의 영웅이라는 정치적인 이야기와 드라마라는 형식을 버물려 맛깔 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태조 왕건>, 2004년 <불멸의 이순신>, <해신>, 2010년 <주몽> 등의 사극에서는 드라마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들을 배치 했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 여성의 역할을 부각시키기도 했고, 영웅에 대한 관점을 달리했다. 사극은 드라마 로서 장점과 단점이 있다.
친숙하지만 뻔할 수 있다. 사극 연출자의 가장 큰 고민일 것이다. 이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전달하는 지에 따라서 드라마의 성패가 좌우된다. 그래서 사극에서는 연출자의 시각과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연출자의 시각과 입장은 역사를 호명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영웅이라고 하면 전형적인 방식이 있었다. 어려부터 총명하였고, 효성도 지극하였다. 한 마디로 리더로서 자질을 타고 났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속담에 딱 어울리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 인기를 모은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이전과는 달랐다.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그려진 이순신의 모습은 익히 알고 있던 영웅이 아니었다. 영웅이 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나약하고 겁 많은 소년이었다. 드라마는 영웅성이나 애국심이 아니라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약한 소년에서 신념에 찬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드라마틱했다. 인간적이었다. 타고난 영웅이 아닌 부단한 노력으로 성장한 영웅이었다. 그래서 영웅적이었다. 영웅은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0년 방영되었던 <주몽>도 비슷했다. 젊은 시절 주몽은 여자꽁무니나 따라다니는 그런 철부지 왕자였다.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경험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났다. 고귀한 신분을 갖고 태어났지만 가장 밑바닥에서 경험을 통해 지도자로 거듭난다는 설정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당시 <주몽>의 인기는 대단했다. 주인공이었던 송일국은 일약 최고의 인기배우에 올랐다. 드라마의 인기를 방영하듯 서점가에도 ‘주몽’ 바람이 불었었다. ‘주몽’이라는 제목의 소설류만 10여종에 달했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학습만화도 3~4종이나 나왔었다. 월드컵 중계로 <주몽> 이 방영되지 않자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외국에서 ‘이상종교’같다고 표현한 월드컵 응원의 열기도 <주몽>의 인기를 막지는 못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남북이 다르지 않다. 북한에서도 민족제일주의를 강조하면서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한다. 고구려와 고려의 민족문화 유적에 대한 복원사업을 강조하거나, 민족문화예술의 현대화를 강조한다. 생활 속에서도 민족적 정서와 민족적 가치를 강조한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규정적이다. 조선민족이면 누구나 <아리랑> 노래를 좋아하고, 김치와 토장국을 즐겨먹고, 치마저고리를 입는다는 식이다. 민족의 범주를 규정하고 순수성을 강조한다. 폐쇄적인 문화민족주의 성향을 보인다.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은 드라마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역사는 북한문화의 가장 일반적인 소재의 하나였다. 삼포왜란을 소재로 한 홍석중의 <높새바람>, 박병식의 <임진의 풍운아>(1993) 같은 작품도 있다. 역사소설로 주가를 높인 홍석중의 <황진이>도 있다. 2000년을 전후하여 창작된 역사소설도 다양하다. ‘고조선 말기의 애국적 명장 성기’를 소재로 하였다는 신구현·리규춘의 <피묻은 청동단검>(금성청년출판사, 2002), 고려말 최무선의 일대기를 그린 강학태의 <최무선>(금성청년종합출판사, 2000), 사육신을 소재로 한 림종상의 <삭풍>(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0). 그리고 단군과 주몽을 소재로 한 리규춘의 <단군>(평양출판사, 2005), 김호성의 <주몽>(1997) 등의 작품이 있다.
북한의 역사소설의 특징은 고구려와 고려 중심이라는 점이다. 2000년 이후에는 역사 소재의 시기를 조선시대로 폭을 넓히면서 <사육신>이나 <계월향> 같은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북한의 역사는 고구려와 고려가 중심이다. 역사적 정통성을 고조선-고구려-고려로 보기 때문이다.
남한 역사의 주요 소재 가운데 하나인 신라나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다. 신라가 외세의 힘을 끌어들였다고 보기 때문에 2004년 <해신>같은 드라마는 제작되기 힘들다. 신라에 의한 통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통일신라’라는 표현보다는 ‘남북국시대’로 규정한다. 북쪽에는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치하는 발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통일신라를 이끈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해서는 ‘사대주의가 골수에 사무친 인물’, ‘젊어서부터 권세욕에 불탔던 야심가로 우리 역사에 큰 죄악을 남긴 반역자, 사대주의자’로 평가한다.
조선시대 역시 봉건국가로서 착취와 피착취계급 사회로 규정한다. 대부분의 인물이 봉건시대 양반계급의 이익에 복종한 인물로 평가된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 봉건국가의 국왕’으로 평가한다.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평가도 후하지는 않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반지주계급, 무관으로 봉건왕권에 충성하며 양반지주 계급을 위해 싸운 장군’이라고 하여 시대적 한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황에 대해서는 ‘관념론적이며 반동적인 철학으로 이조봉건통치배들의 사상적 도구로 복무하면서 당시 인민들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의 발전과 창조적 활동에 해독을 끼친 학자’라고 평가한다. 유물론을 기본으로 하면서 유심론적 입장을 비과학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북의 역사인식도 달라졌고, 영웅을 호명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북한은 인민 중심의 역사를 말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인민대중은 동원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지도자와 인민대중은 가문과 혈통으로 구분된다. 역설적으로 영웅 중심의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논쟁은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였다. 강한 군주가 이끄는 나라를 원했던 이방원, 언제나 좋은 임금이 나올 수는 없다며 능력 있는 재상이 이끌어야 한다는 정도전.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은 왕인가? 재상인가? 대한민국 헌법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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