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는 맛있는 간식을 보면 옷장 속에 감춰두는 버릇이 있다. 북에 두고 온 동생에게 주고 싶어서다. 하지만 동생은 이미 영양실조로 죽고 없다. 엄마는 송화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설마 군과 진짜 양의 거짓말 같은 참말’ 中).
초등학생 후영이에게 갑자기 증조할아버지가 생겼다. 6.25전쟁 때 국군포로가 되었던 증조할아버지가 굶주려 죽은 딸과 손녀 생각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함경도할머니’를 데리고 남한에 온 것. 증조할머니를 비롯한 후영이네 식구들은 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할아버지에게 아빠가 생겼어요’ 中).
지난 가을부터 올 봄에 걸쳐, 국군포로 이야기 ‘할아버지에게 아빠가 생겼어요’와 탈북 아이들의 이야기 ‘설마 군과 진짜 양의 거짓말 같은 참말’ 등 2권의 동화책을 출간한 정길연 작가. 그녀는 30년 전 ‘문예중앙’을 통해 중편소설 ‘가족수첩’으로 등단한 이후 소설, 에세이, 동화 등을 꾸준히 집필해온 중견 작가다. 그녀가 국군포로와 탈북아이들이라는 이 두 가지 주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박선영 동국대 교수(전 국회의원)와의 인연 때문이다. 탈북 아이들, 탈북 국군포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출판해보자는 박 교수의 제안에 적극 동의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수용소나 기아, 고문 등 폭력적이고 처참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읽는 독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잖아요. 거친 소재들을 날것으로 들이대지 않고, 주제의식은 분명히 하면서도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방식으로 다루고 싶었어요.”
정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동화라는 형식이 차라리 더 대중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그녀는 이 책이 어린아이뿐 아니라 온 가족이 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 즉 어린이 ‘동(童)’자가 아니라 ‘한 가지 마음’을 뜻하는 ‘동(同)’자로 바꿔 부를 수 있는 동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화이긴 하지만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그 ‘팩트’가 궁금했다.
“함경도할머니의 경우 실제 국군포로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만난 분이고, 북에서 낳은 아들과 함께 남한에 오셨어요. 세세한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북에서 온 할머니는 여기가 한국인지 북한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않으세요. 실제로 국군포로분들이 여기 와서 행복하게 지내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졌고 지인들은 고령이 됐거나 이미 돌아가셨고요.”
탈북아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송화의 이야기에 나온 것처럼 동생에게 주겠다고 음식을 감춰서 썩도록 내버려둔 아이의 이야기도 사실이라고 한다.
“동생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엄마 따라 한국에 와서 맛있는 거 먹을 때마다 자기 동생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전혀 과장된 게 아니고 오히려 더 비참한 이야기를 줄여서 쓴 거죠.”
이 두 개의 동화책에는 독특한 삽화들이 실려 있다. 그림체가 통일되지 않고 전문 작가의 그림부터 유치한 그림까지 마구 섞여 있다. 바로 화가 채현교 씨와 그의 제자 40~50명이 함께 삽화작업을 했기 때문.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채현교 씨는 삽화를 그려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학생들을 모아 사전에 계획하지 않고 원고를 보여주며 그리고 싶은 부분을 그리게 했는데, 그림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보다는 ‘동참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고. 특히 ‘설마군, 진짜양’은 초등학생들의 그림이 꽤 많이 들어가 있다.
“완성도가 아쉽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있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심지어는 6.25전쟁이 뭔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는데,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많이 알게 됐다고 해요.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미 독자가 된 이 50명의 아이들은 나중에 통일문제, 탈북문제, 국군포로문제가 나오면 더 관심을 갖게 되지 않겠어요?”
책 출간 이후 반응을 묻자 “이걸 이야기해도 되는 단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외에서 반응이 좋아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다고 해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서 정 작가는 북한 문제에 관심이 높은 외국과 달리, 오히려 한국 출판계에서는 이 분야의 콘텐츠가 지나치게 적게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화에서는 그런 소재들이 더러 나오지만 정작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진 못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정 작가는 앞으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로도 제작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북한이탈주민을 만난 정길연 작가는 이들이 폐쇄된 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남한에서의 문화적 충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다문화나 이주노동자들보다 더 남한 사회에 동화되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어깨동무하기 사업과 같은 북한이탈청소년 멘토링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고 밝혔다.
“대인관계, 사회·문화생활의 첫 단계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남북한 모두를 아는 이 아이들이 건강한 통일관을 갖고 잘 성장하면 언젠가는 펼쳐질 통일시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도 정 작가는 정작 자신의 글은 못 쓰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북한인권과 통일문제를 알리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출판사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한다. 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도 있다며 웃는다.
“사실 이번에 책을 펴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담진 못했어요. 한꺼번에 모든 이야기를 담으면 너무 복잡한 요리가 되잖아요. 실제로 이분들을 만나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힘든 이야기가 많아요. 앞으로 이런 남은 이야기들을 써나갈 예정입니다. 다문화 가정 문제도 누군가가 계속 이런 삶이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지금은 사회 전반적으로 이해도가 높아진 것처럼, 북한이탈주민과 국군포로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더 오래된 우리사회의 숙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늦은 셈이죠. 마음이 급하기는 해요.”
<글·사진.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