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꿈꾸다│좌충우돌 남한적응기

김태희·장동건 보다 단아한 여성, 의리남(男)이 최고!

북한을 떠나온 지 2년 반 만에 차분한 충청도 말투를 구사하고 ‘리더십, 스트레스, 쇼핑센터’ 등 외래어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여대생 A씨.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꽃제비’ 생활을 하며 떠돌다 북한의 고아원에 수용돼서 자랐다는 것.
대학 가는 게 꿈이었던 A씨가 “한국 대학공부 별거 아니던데요?”라고 말하며 미소 짓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던 남한적응기를 들어보자.

남한에선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면 벌을 받는다?

A씨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새내기 여대생이다. 사회복지학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북한에서 ‘학원’ 생활을 해서 아동복지 실태를 잘 알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학원’이란 ‘고아원’을 뜻했다.

“고난의 행군이 지난 뒤에, 저도 부모 없이 떠돌다보니 꽃제비생활도 하고 추운데서 배 곪으며 자기도 했었거든요. 허약삼도까지 갔었어요. 혹시 허약삼도라고 아세요?”
‘허약삼도’란 죽기 직전, 즉 뼈에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 고아원이 설립되어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니 처음에는 ‘장군님이 부모 없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고아원을 만들어줬구나’하며 천국에 들어온 것 같았다고.

하지만 인민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본격적인 노동착취가 시작됐다. 소채(채소)와 산나물 채취, 김매기 등에 동원다니느라 공부는 전혀 할 수 없었고 그 대가로 받은 쌀은 교사들이 대부분 가져가 버렸다고.
“감자밥에 쌀을 더 많이 섞어줘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우리 쌀을 가져가 버렸어요. 애들은 막 허약 걸리고(허약해지고), 배고파서 도망치면 다시 잡아다 때리고… 그때 너무 힘들게 생활했던 기억이 나요.”
이미지 북한에서 겪은 일 때문에 교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을 것 같아, 남한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어땠는지 물었다.

“하나원에서 뉴스를 봤는데 남한에선 선생님이 학생들을 폭행 못한다고 들었어요. 때리면 선생님들이 오히려 벌 받고 감옥가야 된다고요. 그래서 애들 말 안 들으면, 여기서 선생님 해먹기 힘들겠다 생각했어요. 나중에 막상 사회에서 만나 보니 선생님들이 모두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좋았어요.”

남한은 잘 산다는데 왜 찢어진 청바지를 입지?

A씨와 남한 문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청바지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왜 남한의 젊은 사람들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긴 잘 산다고 들었는데 왜 찢어진 옷을 입고 다니나? 하며 이상한 눈으로 봤던 것 같아요. 북한에선 ‘오바로크(휘갑치는 박음질)’가 꼼꼼히 잘 된 옷이 제일 좋은 옷이거든요.”
돈이 없어서 해진 바지를 입는 줄 알았다고. 그러고 보니 저번 달에 만났던 남성 B씨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헐어진 바지를 입었기에 첨에 봤을 때는 내(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 있구나, 근데 신발이랑 가방 보면 엄청나게 멋있는데 ‘왜 바지를 불쌍하게 입었지?’라고 생각했어요.”
아직까지 찢어진 청바지는 입고 싶진 않다지만, A씨도 20대 초반의 여성답게 의류나 액세서리 쇼핑을 좋아했다. 하지만 비싼 것은 못 사 입는다고.이미지

“작년까지만 해도 돈 쓰는 게 무서웠어요. 북한에 동생을 하나 남겨두고 왔거든요. 엄마 아빠 사망되고(돌아가시고) 같이 못살았어요. 뭐 하나 쓸 때마다 내 동생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지, 뭐 먹고 있을지 두려워서요….”

A씨가 자랑하는 또 한 가지 남한적응 성과는 바로 ‘물건 값 깎기’다. 제 값 주고 사야 하는 제품은 정해진 가격에 사지만, 정찰제가 아닌 곳에서는 카드보다는 현금을 사용해서 물건 값을 한 번 낮춘 다음, 한 번 더 흥정을 해서 5천원~1만원 정도를 더 깎는다고. 물론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원에서 나온 지 2~3일 지나서 매장에 갔어요. 가방이 필요해서 물었더니 6만 원이래요. 저는 ‘북한에서 왔는데 가진 건 5만 원 밖에 없고 통장에 돈이 있다’고 했더니 통장에서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샀죠. 그런데 웬걸, 다른 데서 보니까 만 원에 팔더라고요. 엄청 분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항상 신중하게 물건을 산답니다.”

못생긴 사람도 TV에 나오는 게 신기해요!

A씨는 북한 학교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지만, 고아원에서는 일에만 내몰렸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에 오면 반드시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2년여 동안 직장을 다닌 후에야 비로소 학비를 벌어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한국 대학공부 별거 아니던데요?”라며 웃는 A씨.

‘한국에선 90%가 외래어를 쓴다’는 말을 듣고 외래어 공부도 많이 한 덕분에 학업이나 일생상활에서 큰 어려움은 없지만 가끔 엉뚱한 데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언니 포스티(포스트잇) 좀 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포스티가 뭐지? 알보고니 메모지더라고요.”
식당에 가서 ‘셀프’라는 단어를 몰라 실수했던 친구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이미지“식당에 ‘물은 셀프입니다’라고 써져있으니까 ‘셀프주세요’라고 했대요. 식당 직원이 ‘예?’라고 되묻는데, 그 상황에서 ‘셀프’가 뭐냐고 물어보기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냥 또 ‘셀프 달라고요~’ 했다네요.”
공부하다가 심심할 땐 뭘 하는지 물었더니 TV를 주로 본단다. ‘런닝맨’이나 ‘무한도전’ 같은 예능프로그램을 주로 본다고. 하지만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단다.
“북한 같으면 예능이나 뭐나 TV에 나오려면 사람들이 다 잘생기고 예뻐야 하거든요. 그런데 개그콘서트 보면 못 생긴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런 사람들이 TV에 왜 나왔지? 여기는 정말 자유롭네하고 생각했었어요.”

<글.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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