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통일 | 여행이 문화를 만나다

선비정신의 ‘멋’ 어우러져 살아가는 ‘맛’, 경북 영주

뜨락을 거니는데 달이 사람을 따라오네
매화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는 것도 잊었더니
옷과 두건엔 향기 가득, 몸에는 꽃 그림자 가득

-퇴계 이황, <도산, 달밤의 매화를 노래함>

경북 영주

가을 어느 날, 옛 길을 걷는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묵은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달빛과 꽃향기가 몸에 배도록 걸었다는 이황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그 인정스러운 마음을 닮아본다. 선비라면 누구나 사랑했을 그 매화의 향기가, 계절에 관계없이 곳곳에 스민 듯하여 서늘한 가을바람도
포근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선비의 땅이다. 영주는 성리학의 근원인 안향의 신위가 있는 소수서원이 있고, 또한 단종애사의 슬픈 역사가 만든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아주 오래도록 ‘우리’를 위안하고 어루만져온 곳이기도 하다.

통합과 평화를 염원한
무량수전의 아름다움, 부석사

부석사의 ‘부석(浮石)’이라는 이름에는 다소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전설이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할 때 선묘라는 아가씨가 그를 사모한 마음이 지극하여, 죽어서 용이 되어 신라로 돌아오는 의상대사를 호위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으로 이 사찰을 세울 때는 도적이 활개를 쳐 방해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마다 용이 된 선묘가 무량수전 뒤편의 ‘부석’을 들어 올려 도적을 쫓아냈다. 어쩌면 용의 호위는 천지가 감응함의 표현이 아닐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워 천명하고자 한 ‘화엄’은 다른 것을 통합하고 어우러지게 한다는 의미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삼국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염원과 그 맥이 닿은 듯하다. 경계를 넘어 다른 것을 이해하고 하나로 어우러져 통합하는 마음, 그것이 어쩌면 삼국통일을 만들어낸 작은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선묘낭자의 전설을 담고 있는 ‘부석’

2013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부석사는 그 자체로 숨 쉬는 유산이다. 무량수전, 삼층석탑,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등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국보나 보물이 무수하고 고려와 조선시대 건축물을 한 데 모아놓았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전하고 평화롭다. 점 하나 더 찍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아름다움 속에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시공을 초월해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 공간 같기도 하고, 꿈속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 무량수전 앞에서 위용을 뽐내는 안양루

‘ ▲ 보물 249호 부석사 삼층석탑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언급한 대로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세 겹의 깊이와 층위가 어우러져 있다. 절까지 들어가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이, 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천왕문과 요사채, 무량수전까지 이어진 질서정연한 돌축대와 돌계단은 사람의 손을 거친 인공의 미, 무량수전부터 조사당으로 오르는 산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 조화롭게 이어져 무척 아름답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이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고려건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유산이다. 무량수전의 기둥이 중앙부가 불룩한 ‘배흘림 양식’인 것도 독특하고 기둥 윗부분의 나무를 겹쳐 쌓아올린 듯한 공포 부분은 당대의 독특한 건축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무량수전 앞에 서서 내려다보면 문득, 몇 백 년쯤 거슬러 전설 속의 인물이 된 듯하다.

▲ 고려 건축의 백미를 보여주는 무량수전

황폐한 역사 위에 다시 세운 마음,
소수서원과 순흥 관아터

바람에 실려 오는 그윽한 솔향기가 느껴진다. 눈 닿는 곳마다 옛 기와집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주 오래된 자취임에도 새롭게 느껴진다. 걷노라면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잊었던 근원에 닿는 느낌이다. 지금은 작은 농촌 마을의 풍경이지만, 이곳 순흥면의 옛 지명은 순흥도호부로 기와지붕의 끝과 끝이 이어질 만큼 부흥했던 거대한 도시였다. 고려 때 ‘한강 이남은 순흥, 한강 이북은 송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이곳에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운동(1456~1457)’이 실패한 뒤 사람들은 죽거나 흩어지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어 떠돌아다녔으며 번성했던 고을은 쇠락했다.

' ▲ 소수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수박물관 내부 순흥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은 백 년쯤 후 풍기군수 주세붕과 이황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세붕은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의 고향인 이곳을 기려 1542년 ‘백운동서원’을 짓고 이 땅을 성리학의 근원으로 명명한다. 주세붕은 자나 깨나 풍기 고을을 먹여 살릴 연구에 몰두했던 실천형 리더였는데, 이때 소백산 토질에 맞는 인삼을 들여와 현재까지 풍기의 대표적인 고을 브랜드로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주세붕 다음으로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 역시 안민(安民)의 보폭이 넓은 지도자였다. 왕에게 직접 건의해 서원의 지위를 세우고, 1550년 이곳을 명종이 직접 하사한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때부터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지로, 또 백 년의 상처 위에 빛나는 새 역사를 싹틔우는 공간으로 변모된다.

순흥의 옛 관아터에는 당시 관원들이 휴식을 취하던 후원이 남아 있다. 도호부 후원은 ‘봉도각’이라는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진 곳으로 ‘연비어도(鳶飛魚跳)’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 말은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연못엔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중용>과 <시경>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높고 낮음이 없이 귀한 자신만의 생명력을 영위하는 조화로움의 세계, 즉 성리학의 정신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흩어진 혼백을 위로하는 방법. 어쩌면 이곳에서의 선비정신은 아픈 역사를 위로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 학문을 강론하던 소수서원 강학당

선비의 마을을 감싸 도는 물줄기,
무섬마을

역사는 여기서 돌아들어 마을을 안고 흐르는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용서하는 걸 배우기 위해 지난 일을 돌아보는지도 모른다.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내성천과 서천이 합류한 강물이 태극문양으로 마을을 휘감고 도는 모습이다. 이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고 하여 ‘물 위의 섬’이라는 뜻의 ‘무섬’이라 한다. ‘선비마을’이나 ‘선비촌’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고풍스러운 전통가옥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이곳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는데,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는 콘크리트 다리가 있지만 2005년 마을을 복원할 때 외나무다리가 다시 놓여졌다. 딱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나무다리로 길이가 150m쯤 된다. 이 다리를 건널 때는 나이와 직급 같은 서열이 필요 없고 건너편에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 다 건너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양보하고 나누는 삶의 이치가 담겨 자못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곳에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 조화롭게, 사상과 신분을 넘어 어우러지며 살아왔던 전통이 있다. 양반과 상민, 신분에 관계없이 항일운동을 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도서숙’이란 교육기관을 세워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신분과 이념을 넘어 다양한 사상이 자유롭게 공존한 이곳의 근간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 냄새 나는 곳,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예안 김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해우당’이나 ‘만죽재’ 등 우리 고택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선비들이 살았던 곳, 먹었던 것, 그 모든 풍경이 과하지 않고 깨끗하게 느껴지는 건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정신 때문일까. 여행은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자꾸만 더 보고 싶고 궁금해진다.

▲ 무섬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외나무다리

▲ 무섬마을 입향시조의 고택인 만죽재

‘ ▲ 풍기인삼을 포함한 일곱 약재를 넣은 ‘칠향계’

선비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옛부터 이 부근은 인삼의 고장으로 불렸다. 이를 이용해 영주에서는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오면 풍기 인삼을 포함해 잔대, 천초 등 일곱 가지 약재를 넣어 만드는 ‘칠향계(七香鷄)’를 손님상으로 냈다. 이는 양반가의 집안 내림 음식으로 400년 전 장군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즐겨 먹던 보양음식이었다고 한다. 한 그릇을 받아드니 인삼 향이 그윽하게 올라와 자연 몸보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몸도 보신, 마음도 보신되면서 어쩐지 깨끗해진 것 같고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 마을을 감아 도는 물처럼 천천히 흐를 줄 알고 헤아릴 줄 알게 된 한 젊은 객(客)이 다리를 건너 선계에서 풍진으로 되돌아간다. 어느 가을 하루였다.

<글: 김혜진 / 사진: 김규성>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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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09-11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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