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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서 깊게 뿌리 내리세요”

손수 재배한 토마토로 과채즙 생산하는 김명희 씨

여우비가 지나간 아침, 김명희 씨 부부가 운영하는 과채즙 공장에 새빨간 토마토들이 한 가득 실려 왔다. 추석을 맞아 과채즙
주문이 밀려든 까닭이다. 명희 씨는 12년 전 한국에 들어와 부여 토박이인 남편 이인수 씨를 만나 저온 숙성즙을 생산하고 있다.

김명희 씨

브리핑 연습으로 남편의 과채즙을 알리다

명희 씨는 새벽 4시면 눈을 뜬다. 하우스와 마을 농가들을 들러 그날 짤 것을 수확하고, 수확한 과채들을 씻고 다듬어 즙을 내다보면 하루해가 저물기 때문이다.

처음 토마토주스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은 명희 씨였다. 토마토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에서다. 대신 단맛이나 물이 들어간 주스가 아닌 ‘토마토 하나를 통째로 먹을 수 있는 즙’을 생산하자고 말했다.

명희 씨의 말에 남편 인수 씨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대사증후군이나 당뇨병에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토마토 특성상 살짝 익혔을 때 영양소 섭취율이 높아진다는 점에 착안해 지금처럼 껍질째 갈아 저온 숙성한 제품을 만들었다.

‘ ▲ 김명희 씨 부부가 직접 수확한 토마토

‘ ▲ 재배한 토마토를 과채즙 공장으로 운반 중이다

토마토즙은 출시와 함께 ‘굿뜨래 인증’을 받았다. 굿뜨래 인증은 부여군 공동 상표조례에 따라 2년 주기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수한 상품의 품질을 인증하는 제도다. 덕분에 명희 씨네 토마토즙은 곳곳에서 맛과 영양을 인정받았고, 인수 씨는 명희 씨에게 대표 명의를 넘겨주며 아내를 응원했다.

남편의 외조에 힘을 얻은 명희 씨는 그때부터 저온 숙성 과채즙을 알리기 위한 브리핑 연습을 했다. 남편이 만든 자랑스러운 식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에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기업의 OEM 제작을 수주해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조만간 시작될 홈쇼핑 판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남편이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제품들도 차근차근 출시할 예정이다.

‘ ▲ 주문들어온 즙을 포장 중인 남편 이인수 씨

‘ ▲ 과채즙 작업 중인 김명희 씨 부부

국어선생님 명희 씨가 인수 씨를 만났을 때

명희 씨와 남편은 운명처럼 만났다. 두 사람은 교회 식사 자리에서 일면식이 있었는데, 명희 씨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우연히 들른 인수 씨가 명희 씨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날로 인수 씨는 명희 씨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었고,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에 성공했다.

명희 씨는 북한에서 국어선생님이었다. 고위급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덕에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던 명희 씨는 중학교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벽소설(단편소설보다 내용과 형식이 짧은 북한 소설)과 단편소설로 여러 차례 전국 창작상을 탔다. 이후 청진사대를 졸업하고 중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일했지만 얼마 안 돼 사고를 당해 교직을 내려놓게 됐다.

명희 씨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25살 즈음이었다. 친구들과 시장에 갔다가 만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저녁거리를 마련해야 한다며 아이를 업고 사탕을 팔고 있는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꽃제비’라 불리는 아이들이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갔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구걸하는 여자들도 흔했다. 명희 씨는 그제야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북한은 7~8시면 새카매요. 그런데 중국은 그렇게 현란할 수가 없더라고요. 사람들도 행색이 달라요. 우리는 못 먹어서 빼빼한데, 중국 사람들은 보기 좋더라고요. 나도 저 나라에 한 번 가봤으면 했는데, 사람들이 남한은 더 좋다고 하더라고요.”

1997년 중국으로 넘어간 명희 씨는 8년 가까이 현대상선에서 일했다. 자동차나 컨테이너를 실어 운반해주는 회사였다.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명희 씨와 아버지만 2005년 한국에 들어왔다.

김명희 씨

‘당당한 김명희’ 를 되찾아준 사람들

한국에 정착하는 동안 명희 씨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탈북민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다르게 볼 거라는 의심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명희 씨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했다. 10년이든 20년이든 열심히 살다보면 사람들도 명희 씨를 믿어줄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명희 씨를 버티게 해준 건 곁에서 응원하고 지켜봐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특히 명희 씨는 남북하나재단 충남센터 심재숙 차장과 이종구 담당형사에게 고맙다고 했다.

심재숙 차장은 명희 씨가 밤에 자다가도 무서워 전화를 하고,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위로를 해주는 엄마 같은 분이었다. 이종구 형사는 명희 씨가 물건을 사거나 은행 업무 등을 볼 때 일일이 가르쳐주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나오면 지원서까지 챙겨다주는 분이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남편이다. 결혼 후 명희 씨 말투 때문에 연변 아가씨를 데리고 왔느냐며 짓궂게 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남편은 “내가 찾는 귀한 사람이 한국에 없어서 하나님이 이북에서 보내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명희 씨는 그런 남편의 사랑 덕분에 지금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2017년 굿뜨래 행사장에서 설맞이 할인판매 중인 제품들

‘ ▲ 김명희 씨 부부가 농사짓는 토마토하우스

지금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니라

명희 씨는 요즘 꿈이 생겼다. 하우스와 공장을 확장하게 되면 직원을 추가 고용해야 하는데, 정직원의 70%를 탈북민으로 채용하는 것이다. 탈북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명희 씨이기에 그들과 즐겁게 일하며 함께 정착해나가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저는 탈북민들이 한 곳에 오래 정착했으면 해요. 나무가 뿌리를 옮겨 다니면 살기가 어렵잖아요. 새로 뿌리 내리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어딜 가나 처음에는 돌작밭(자갈밭의 강원・충청 사투리) 같아도 오래 지내다보면 노하우도 생기고 사람들도 나를 인정해주더라고요. 여러 곳을 전전하지 말고, 남이 뭔가 도와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언젠가 그 자리에서 꽃 피울 날이 오거든요.”

통일이 되면 명희 씨는 고향에 공장을 세워 우리 농산물로 저온 숙성즙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북한에서 경제활동을 배우지 못한 것이 한국생활에 큰 걸림돌이 됐던 기억 때문이다. 그리고 만두공장을 만들어 밥을 굶는 아이들에게 만두를 나눠줄 생각이다. 만두는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제일 좋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명희씨는 남편을 도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과채즙을 만들며 탈북민의 희망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 ▲ 탈북민들에게 과채즙 생산 과정을 설명해주는 김명희 씨

‘ ▲ 계약 재배 중인 블루베리 농장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김명희 씨

※ 웹진 <e-행복한통일>에 게재된 내용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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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발행 : 2017-09-11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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