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량한복을 입은 서른여덟 명의 청년들이 베를린장벽과 브란덴부르크문(門) 앞 광장 앞에서 ‘고향의 봄’과 ‘홀로아리랑’을 부르던 날. 독일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은 통일을 염원하는 그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끄떡없을 것만 같던 저 단단한 장벽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의 휴전선도 언젠가 그 문이 활짝 열릴 거란 생각으로, 북한에도 하루빨리 찬란한 봄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 세계인들을 향해 통일노래를 부르며 애달픈 눈물을 뿌렸다.
e-행복한 통일 : 2년 전 가수 이승철 씨와 함께 한 독도 합창공연이 SNS 등에서 큰 화제가 됐었는데, 이번 원정대 활동은 어땠나요?
김영호 : 사실 공항 사정으로 7월 24일 당일에 도착하는 바람에 다들 잠을 못 자고 바로 공연에 들어갔어요. 큰 공연만 두 건이었는데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었던 장벽박물관에서 공연을 하면서 감을 잡았고, 두 번째 이어진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선 최상의 공연을 보여드렸다고 생각해요. 노래는 한국말로 불렀지만 영어멘트를 통해 우리가 왜 이 노래를 부르는지 설명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줬어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린다는 주말 오후 3시에 광장에서 공연을 한번 한 뒤, 관객들의 사인을 받고 다시 한 곡을 더 부르기로 했는데, 사인 행렬이 길어지는 바람에 공연 시간이 약간 지체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우리의 통일에 세계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구나’라고요.
박영철 : 현장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어떤 분께서 ‘남북한의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부터 관심을 가져야겠다’며 열심히 살아달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또 하일란트 교회 공연에서는 파독 간호사 등 현지 교민들이 주로 오셨는데 눈물 흘리는 분들이 많았어요. 탈북청년들이 와서 노래를 하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하다고 하시면서요.
김영호 : 여름 휴가철 치고는 이례적으로 많은 관객들이 모였다고 하시더라고요. 들어보니 독일 교포사회 역시 진보 보수로 나뉘어서 서로의 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북청년들을 봐서라도 와달라고 부탁하니까 양쪽 교민들이 다 같이 모이셨어요. 다만 뮌헨에서 총기사건이 일어나서 독일 국민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던 건 좀 안타까웠지만요.
박미연 : 두 번째 날에 거리를 지나는 외국인들이 저희를 알아보시더라고요.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합창을 했던 코리안 싱어라면서 말을 걸어오셨어요. 놀라웠죠.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단 마음이 들었고, 이렇게 꾸준히 하면 전 세계가 우리 노래에 귀 기울여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행실을 똑바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죠(웃음).
이채연 : 막상 장벽 앞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이곳 독일 사람들은 하나가 됐는데 우린 언제 하나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도 이런 메시지와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통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봤어요.
e-행복한 통일 : 통일원정대 합창에서 ‘고향의 봄’ 노래도 함께 부른 이유는?
박영철 : 통일이 되는 날은 탈북청년들이 ‘고향 가는 날’이에요. 브란덴브루크 광장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어떤 분이 이런 메시지를 남겨놓으셨더라고요. ‘내 고향이 함경북도 함흥입니다.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요.
이채연 : 고향의 봄을 부를 때는 아팠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아요. 고향의 봄은 우리 고향에서도 많이 부르던 노래인데 남한도 이 노래를 부른단 게 신기했어요. 저는 고향에 가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제 생일날 저녁에 친구들이 파티를 해주기로 했는데 ‘가겠다’고 해놓고 그날 밤 북한을 떠나왔거든요. 그래도 가장 미안한 사람은 아빠에요. 저와 함께 남한으로 오시다가 남은 가족들 걱정에 돌아섰다 붙잡히셨어요. 탄광에서 노역을 하시던 중 갱도가 무너져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6년 전 일인데 왜 그때 같이 남한으로 오자고 설득하지 못했을까 계속 후회가 되고 마음이 아파요.
e-행복한 통일 : 그럼 가족들은 아직 북한에 있나요?
이채연 : 아뇨. 아빠한테 너무 큰 죄를 지은 거잖아요. 엄마랑 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죄인이 될 것 같았어요. 저 3년 동안 미친 듯 일만 해서 번 돈으로 남한에 모셔왔어요.
박영철 : 처음에는 남한에서 적응하느라 잘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요. 어느 날 중국에 돈을 벌러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오래 굶어서 기력 없이 누워계시고 동생은 멍한 눈으로 마당에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남겠다고 하셨어요. 떠나는 날 동생은 ‘아빠가 계속 우리 보고 계신다’며 자꾸 뒤를 돌아봤지만, 전 마음이 약해질까 봐 보지 못했죠. 몇 해 전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 더 많은 돈을 드리지 못하고 나온 게 두고두고 가슴이 아파요.
e-행복한 통일 : 통일원정대는 남북한이 단합된 목소리를 내보자는 생각으로 탈북청년과 남한사람들이 같이 만든 팀이라고 들었어요. 화합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
김영호 : 탈북청년 25명에 남한 청년과 음악인 13명이 함께 했는데 남북한 구분을 떠나 이제 ‘형님 동생’하며 서로 친해졌어요. 직장인이 절반, 학생이 절반이었는데, 매주 3~4시간씩 연습했고 녹음을 앞두고는 주말에 텐투텐(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10시까지 하는 연습)을 할 정도로 빽빽한 일정이었죠. 다 같이 힘들고 피곤한 상황에서 한 명이 음 이탈을 하면 전원이 다시 나와 연습하고 녹음을 하기도 했지만 다들 불평 없이 잘해줬어요.
현정범 : 탈북청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남한청년들도 같이 한다는 말에 화합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별로 다른 점을 찾지도 못했고 서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더 화기애애해졌어요. 통일이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e-행복한통일 : 통일원정대를 이끈 위드유 모임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박영철 : 주로 2000년대에 북한을 탈출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친구, 선후배들이 2011년에 만든 모임이에요. 북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기 위해서, ‘탈북민들이 남한에 적응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멘토링프로그램 등을 통해 탈북 후배들을 돕는 활동을 해나가고 있어요. 합창을 하게 된 건, 2013년 처음 마중물 음악회를 열어 홀로아리랑 중창을 선보였을 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면서부터예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죠.
e-행복한통일 : 2014년에는 가수 이승철 씨와 독도에서도 합창을 했죠? (웹진 19호 참조)
박영철 : 네. 위드유를 포함한 45명의 탈북청년이 독도에 갔어요. 독도는 남북한 모두가 사랑하는 우리의 땅이잖아요. 독도가 남과 북을 잇는 징검다리인 것처럼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한 탈북청년들이 통일의 징검다리가 되겠다, 통일을 향한 길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했죠. G&M글로벌 문화재단의 후원이 있긴 했지만 독도에 가는 비용은 전원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직접 마련했어요. 그리고 독도에서 합창을 하면서, ‘우린 하나가 돼야 한다, 희망의 눈으로 바라봐 달라’고 선포했죠. 이번 통일원정대 활동이 이슈가 되긴 했지만, 위드유는 ‘탈북민 스스로를 돕자’는데 있는 만큼 앞으로도 크게 소리는 나지 않지만 알찬 활동들을 해나갈 겁니다.
e-행복한통일 : 남북한 주민이 화합하며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요?
현정범 : 평소엔 별 문제가 없는데, 아무래도 북한사람 누군가가 부정적 이슈로 뉴스에 나오면 북한사람 전체가 나쁘게 보이곤 하잖아요. ‘탈북민’이라고 구분지어 보도하니까요. 따라서 남북한사람 구분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고, 북한사람 역시 남한사람들에 대해 신뢰를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뭘 지적하면 ‘북한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했다가, 부드럽게 대하면 ‘불쌍하게 보는 거냐’고 투덜대고…. 서로 믿음을 쌓아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김영호 : 북한 친구들은 너무 조심스러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남한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 것 같아요. 또 탈북청년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정말 완전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해요. 일단 포기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을 하면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사회에 나와서도 그런 것들이 다 도움이 되니까요.
이채연 : 회사든 학교에서든 제가 만난 남한 사람들은 욕할 때 욕하고 칭찬할 때 칭찬하면서 그냥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줬어요. ‘나 사실 북한에서 왔어’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줄 알았는데 ‘그게 어때서?’라고 거꾸로 물어보면서 다 같은 한국인일 뿐이라고 말해줘서 너무 좋았어요.
박영철 : 이산가족 생존 어르신들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에 대한 필요성이나 열망들이 식어가는 것 같은데, 이런 때 일수록 탈북청년들이 남한사람들과 함께 통일의 불씨를 지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냄비 속 물의 온도가 올라가듯 국민의 통일 의지도 높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박미연 : 통일을 앞당기려면 끊임없는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독일에서 느낀 건, 독일이 통일을 위해 엄청 많은 관심을 가지고 묵묵히 준비했다는 거예요. 지금 저는 통일과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제 고향도 이북이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신 부모님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나이가 들어도 잊지 말고 통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갖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선은 제가 남한 직장에 더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게 중요하겠죠?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 위 토크 내용은 7월 23일부터 28일까지 ‘오늘의 베를린에서 내일의 평양을 본다’는 주제로 이뤄진 하나통일원정대 활동(KEB하나은행 후원) 후기입니다.
<글.사진 /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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